검사들은 자신만의 파일을 은밀히 보관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든지 ‘사건’이 될 수 있는 수사 단서(端緖)나 기록을 캐비닛에 넣어 두고 때를 기다린다. 사실상 검사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살아 있는 권력’이 한편으로는 검찰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력에서 멀어지면 검찰이 캐비닛을 열고 자신에 관한 파일을 만지작거리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검찰 캐비닛’에는 검사 개인의 자료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검찰 조직의 ‘정치적 판단’도 보관된다. 한 전직 검찰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검찰총장은 캐비닛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곤 했다. 예컨대 수사책임자가 집권당이 관련된 민감한 사안을 보고하면 그 서류를 캐비닛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 그걸 보고 중앙수사부장이나 서울지검장은 ‘여기에서 그치라는 것이구나’ 하고 감(感)을 잡았다. 그렇게 알아서 종결된 사건이 적지 않다.”
요즘 세간의 관심이 검찰에 쏠려 있다. 재계 2위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이 검찰의 포위망에 두 손을 든 형국이고, 국부(國富) 유출 논란에 휩싸인 외환은행 매각 미스터리도 검찰에 의해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2003년 외환은행 매각 당시 정책결정 라인에 있었던 고위 관료를 포함해 출국 금지 대상자가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번에도 검찰의 ‘호흡 조절’ 여부가 궁금증을 부른다. 원론적으로는 모든 범죄혐의를 끝까지 파헤쳐야겠지만 특히 기업 수사의 경우 그것이 꼭 능사는 아니다. 검찰도 “현대차 사건이 국민경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사를 가급적 빨리 종결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수사방향과 사법처리 범위를 고민하는 검찰의 호흡 조절이 대부분 정치적 계산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검찰은 애초 현대차 사건을 두고 “건축 인허가와 관련된 로비 수사다. 후계구도 문제는 전혀 아니다”라고 했다. 금융브로커 김재록 씨가 수사의 본류(本流)라는 해설까지 곁들였다. 이내 검은돈을 받은 정관계(政官界) 인사들의 이름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며칠 뒤부터 로비 수사는 간데없고 정몽구 회장 부자(父子)의 편법 재산증식과 변칙 상속이 본류가 됐다.
검찰은 이에 대해 ‘수사는 진화하는 생물’이어서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 아니냐고 했다. 김 씨를 구속하면서 “배후를 밝히는 게 핵심”이라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얘기다. 정치적 복선(伏線)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하다. 김 씨는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실세(實勢)들과도 ‘형님, 아우’ 하며 지냈다지 않는가.
물론 비자금을 조성해 변칙 상속을 기도한 대기업의 불법 행위는 밝혀야 한다. 국민의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흔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검찰이 처음에 다짐한 배후 수사가 곁가지가 될 수는 없다.
외환은행 매각 사건도 마찬가지다. 대형 은행 매각은 재정경제부 장관과 금융감독위원장 선에서 판단을 하고, 최종적으로 청와대의 결심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걸 국민은 다 안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는 아직 국장급 실무자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수사 초기여서 그렇다고 믿고 싶다.
정상명 검찰총장이 복무 방침으로 내건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검찰’이 또 캐비닛을 열고 닫아선 안 된다.
송대근 논설위원 dk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