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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밟아라, 밟아”…스피드 마니아

입력 | 2006-04-14 03:00:00


《귀를 찢는 듯한 타이어 소리, 롤러코스터를 탄 듯 순식간에 기우뚱하는 몸. 아마추어 카레이서들이 승부를 다투는 경주인데도, 순간 순간의 긴장 때문에 현기증마저 일어난다. 한 카레이서와 함께 체험 주행에 나선 기자는 몇 번이나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 튕겨 나갈 듯한 속도를 내며 앞 차의 꽁무니에 바짝 붙을 땐 기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9일 오전 9시경 경기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에버랜드 앞. 전국을 덮은 황사로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날씨도 을씨년스럽다. 그럼에도 이곳 자동차 경주장 ‘스피드웨이’의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다. 1∼2시간 전부터 자동차 엔진을 길들이고 정비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하고 그 소리가 황사의 매캐함을 날려버리고있다.》

오전 9시 20분. 첫 출전 선수들이 차를 몰고 경주로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활기차던 선수들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헬멧 사이로 비치는 눈빛엔 긴장감마저 돈다.

드디어 출발. 굉음을 내며 자동차들이 직선주로로 쏟아져 나왔다. 급커브를 돌며 귀를 찢는 타이어 소리, 한 차가 부딪칠 듯 살짝 비켜 가며 앞차를 추월하자 탄성이 들려온다. 폭발하는 듯한 스피드로 2.125km의 서킷을 질주하는 선수들. 그런데 이들은 프로 카레이서가 아니다. 회사원 자영업자 학생 등 ‘보통’ 사람들로 이곳에서 올해 처음 열린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클릭전)’에 참가했다.

클릭전은 같은 차종(클릭이나 쎄라토)으로 스피드를 겨루는 ‘원 메이커’ 경주다. 같은 차종, 같은 조건 아래서 운전 실력만으로 승부를 가리고 비용도 부담스럽지 않아 해마다 참가 인원이 늘고 있다.

스피드가 마냥 좋아 “금연 금주하고 모은 용돈으로” “옷 한 벌 안 사고 아낀 돈으로” 아마추어 레이서가 된 사람들. 지하철 기관사인 한정구(50), 여성 카레이서 이지현(33), 연구원 유태훈(31) 씨를 따라 스피드 축제의 현장으로 갔다.

○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대신 레이싱을 하죠.”

한 씨는 지난해 신설된 2000cc급 엔진을 탑재한 ‘쎄라토 클래스’의 최고령 선수다. 전체 참가자 중 클릭 클래스의 박일용(54·자영업자) 씨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한 씨는 스피드 경기에서 승부의 관건 중 하나인 타이어 세팅이 원활하지 않아 오전 내내 애를 먹었다. 6일 연습 주행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지만 이날은 평소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다.

서울 메트로 지하철 2호선을 운행하는 그는 “직업이 운전이어서 자동차도 잘 다룰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지만 사실은 제대로 운전을 배우고 싶은 생각에서 입문했다”고 말했다.

“원래 취미는 수석 모으기였죠. 조용하고 차분한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전을 하고 싶어 드라이빙 스쿨에 문을 두드린 게 이 세계에 빠지는 계기가 됐죠.”

그가 클릭전에 매력을 느낀 것은 개방적인 분위기. 드라이빙 스쿨에서 라이선스만 따면 바로 참여할 수 있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도 대회 참여가 가능하지만 처음에는 동호회에 가입해 도움을 얻는 게 좋다”고 말했다.

1년에 4번 열리는 드라이빙 스쿨은 굳이 대회 참가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운전 실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교육 과정은 화성자동차시험연구소에서 이론 및 기초실습 1일, 스피드웨이에서 경기장 실습 1일로 구성된다. 경기참가 라이선스는 11만 원, 일반 주행은 6만 원으로 올해 두 번째 드라이빙 스쿨은 6월 18일 열린다.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함께 즐긴다는 것도 장점. 참가자들은 이날 한 씨를 “큰 형님”으로 불렀다. 가수 김진표와 탤런트 안재모 씨 등 연예인들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김 씨는 ‘클릭 클래스’에 직접 참가했다.

“처음엔 가족이 말리기도 했죠. 하지만 담배와 술도 끊고 레이싱만 취미로 한다니깐 차라리 낫다는 눈치더군요. 남편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게 사니까 좋아 보인다고 아내가 그럽디다.”(한 씨)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의 ‘F클래스’ 결승전. 예선에서 가장 앞섰던 서호성 김남균 선수가 골인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을 벌였다. 이날 김남균 선수가 우승했다.

○ “10만 원도 안되는 비용으로 주말을 신나게.”

클릭전은 오전 예선과 오후 결승으로 나뉘어 열린다. 예선전은 30분간 진행되는데, 몇 바퀴를 도느냐와 상관없이 가장 빠른 주행 기록이 예선 기록이 된다. 결승전은 이 기록에 따라 3단계(J, S, F클래스)로 나뉘어 치른다. 순위는 결승선을 먼저 통과하는 것으로 매긴다. 예선 기록이 좋을수록 출발선의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 씨는 자동차 경기에 처음 출전하지만 그리 긴장돼 보이진 않았다. ‘즐거운 주말’을 보내는 데 참가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첫 출전에 가장 높은 등급인 F클래스 결승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결승에서 성적은 하위권이었으나 만족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 씨는 스키 강사 자격증도 가진 스포츠 우먼. 클릭을 몰기 전까진 스포츠카 티뷰론을 튜닝해 몰았다. 익사이팅 스포츠를 즐겨 온 덕분에 자동차 경주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도 식구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설계 담당인 그는 “평일에는 시간이 없는 데다 세밀함을 요하는 정적인 직업이어서 주말을 그 반대로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자동차 경주라고 하면 ‘귀족 스포츠’를 연상하지만 이 씨를 비롯해 대부분의 참가자는 자가용으로 경기한다. 대회를 위한 차량개조(튜닝) 비용도 예상보다 많지 않다. 순수하게 운전 실력만 겨루자는 대회의 취지답게 엔진 등 성능 부품은 순정용품 그대로 사용한다.

타이어 휠이나 서스펜션 등 안전을 위한 튜닝만 이뤄지는데 160만 원 정도 든다. 시중에서 튜닝할 경우 약 500만 원 들지만 대회를 운영하는 KMSA(Korea Motor Sports Association)가 협찬사를 구해 가격을 낮췄다.

“대회 참가비 5만 원과 휘발유 값을 포함해도 10만 원이 안 듭니다. 주말 하루 신나게 스트레스 풀고 이 정도면 싼 거 아닌가요? 남자 친구가 말리면요? 제가 오히려 같이 참가하도록 설득할 겁니다. 한번 달려 보면 못 빠져나오거든요.”

○ “가족 모두 함께 즐길 수 있어 더 좋습니다.”

팬택 중앙연구소의 전임 연구원인 유 씨는 두 아이의 아빠다. 이번 대회에 6세 된 큰아들과 다음 주에 100일을 맞는 아이도 아내와 함께 응원을 나왔다.

클릭전은 자동차 경주이긴 해도 축제나 다름없다. 참가자 가족도 많지만 연인이나 에버랜드에 왔다가 구경하는 사람도 꽤 있다. 연인 사이인 김영준(35) 최수인(31) 씨는 “아마추어 대회여서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레이싱 걸도 있고 박진감이 프로경기 못지않다”며 즐거워했다.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승용차로 경주로를 돌거나 동호회의 시험 주행도 열린다. 특히 대회 참가자가 모는 차에 타보는 동승 체험 주행은 백미. 일반인임을 고려해 평소보다 천천히 몰지만 속도감은 엄청나다.

남편의 자동차 경주를 싫어하던 유 씨의 아내도 체험 주행을 해 보고 마음이 바뀐 경우. 활기차고 건강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예상보다 안전하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지난해 탤런트 김준희 씨가 대회에 참가했다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상처는 ‘반창고 하나 붙일’ 정도였다.

큰아들 성빈이가 아빠의 경주를 좋아하는 것도 아내가 생각을 바꾼 이유 중 하나다. 성빈이는 연방 “아빠 최고, 커서 아빠가 모는 차를 물려받아 몰 거예요”라며 깡충깡충 뛰었다. 아이의 응원 덕분인지 유 씨는 J클래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자동차를 재산으로 생각해서인지 자동차 경주가 인기가 없죠. 하지만 자동차를 생활의 일부이자 가지고 노는 레저의 대상으로 보면 생각이 바뀝니다. 비싼 돈 들여 산 차를 100% 즐길 수 있는 방법, 그중 하나가 자동차 레이스 아닐까요?”

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떻게 참가하나…드라이빙스쿨 수료후 안전장비 갖추면 OK

올해 처음 출전한 클릭 클래스에서 최고 등급인 ‘F클래스’ 결승에 오른 여성 아마추어 카레이서 이지현 씨.

국내 자동차 경주대회는 4가지로 나뉜다. 아마추어들이 참가하는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과 ‘엑스타 타임트라이얼 레이스’, 프로 및 프로급 실력을 갖춘 카레이서들이 출전하는 ‘BAT GT챔피언십 시리즈’와 올해 신설된 ‘KGTC(Korea Grand Touring Car Championship) 시리즈’가 있다. 국내에서 전문 프로카레이서는 20여 명에 불과하다.

9일 처음 열린 클릭전은 올해 7번의 경기가 열린다. 강원 태백시의 태백준용서킷과 경기 용인시 스피드웨이를 오가며 열린다. 2회전은 다음 달 14일에 열린다. KMSA 홈페이지(www.clickfestival.com)를 참조. 031-332-3725

클릭전은 ‘클릭’ ‘쎄라토’ 등 같은 차종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인 데 비해 타임트라이얼은 차종의 제한이 없다. 배기량 1600cc 이하, 1600∼2000cc의 ‘일반전’, 배기량에 제한이 없는 ‘슈퍼전’으로 나뉜다.

타임트라이얼은 일정한 간격으로 출발해 정해진 구간을 얼마나 빠르게 통과하는가를 다투는 경기다. 주행 시간이 짧을수록 이긴다. 레이싱의 예선 방식이 아예 본선 경기가 된 경우다.

드라이빙스쿨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소화기 규정안전벨트 등 기본 안전장비만 갖추면 참가할 수 있다. 올해 7번 열리며 2일 2회 대회가 열렸다. 다음 대회는 7월 9일. www.timetrial.co.kr

KGTC(www.kgtc.net) 시리즈와 BAT GT챔피언십은 프로레이서를 포함해 준프로가 출전하는 대회. BAT 챔피언십은 2001년 시작돼 국내 최고의 자동차 경주대회로 인정받아 왔으나 최근 스폰서십 협상이 깨져 올해 대회가 무산됐다.

KGTC 시리즈는 한국자동차경주선수협의회가 중심이 돼 올해 새롭게 시작했다. 지난달 26일 열린 1회전에서 탤런트 이세창-안재모 조가 투어링A 종목에서 우승해 화제가 됐다. 2회전은 23일 태백준용서킷에서 개최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