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에스모드는 매년 200명의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패션학교다. 13일 이 학교 2층 모델리슴 실습실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이 디자인한 옷에 사용되는 천을 직접 재단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파리를 패션의 도시라고 부른다.
단순히 샤넬 같은 큰 패션 브랜드의 본사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내 구석구석의 작은 가게에서 자신만의 감각을 뽐내는 수많은 디자이너가 파리를 진정한 패션의 도시로 만든 주인공이다.
이 디자이너들을 키워내는 학교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에스모드다. 파리 시내 오페라 극장에서 멀지 않은 에스모드는 겉보기엔 그렇고 그런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중충한 외관과는 영 딴판의 풍경이 펼쳐졌다. 1층 홀은 현란한 색상의 옷들로 장식돼 전시장을 찾은 듯했다.
건물은 1층부터 천장까지 시원하게 뚫려 모든 층에서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1층의 내벽은 그리스 스타일의 아이보리 석재로 건축됐다. 2층부터는 시커먼 색상의 철제 구조물로 건축됐다. 에펠탑을 지은 구스타브 에펠이 철제 부분을 설계하고 건축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건물 자체만으로도 창의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곳답다는 인상이 들었다.
스타일 과정을 가르치는 3층의 한 교실. 교수와 학생이 여성복 스타일화를 앞에 놓고 토론이 한창이다.
아멜리 메르시에 씨는 “유아적인 느낌에 조급해하는 여성의 심리를 결합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더는 진도가 안 나간다”며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곳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인 윤성보 씨는 “기성제품을 너무 많이 참고해서 그런 것 같다”면서 “코피에 콜레(Copier-Coller·복사해 붙이기)를 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미 형성된 이미지에 집착하다 보면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 어렵다는 것. 윤 씨는 11년 전 에스모드를 졸업하고 프랑스 의류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뒤 모교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해 6월 에스모드 파리 졸업작품 발표회에서 무대의상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졸업생의 작품. 사진 제공 에스모드 서울
다른 교실에선 한 학생이 재질과 색상이 다른 천 조각들을 꺼내 놓고 교수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드레스에 어떤 소재를 적용하는 게 적당할지 의논하는 중이었다.
이곳의 수업은 이처럼 철저하게 대면(face-to-face) 수업으로 진행된다. 에스모드의 특징이다. 원활한 대면 수업을 위해 한 반의 학생은 최대 30명으로 제한된다.
이런 수업 특징 때문에 프랑스어를 웬만큼 하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다. 기초를 배우는 1학년 과정은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지만 2, 3학년 과정은 중급 이상의 프랑스어가 요구된다.
3년 과정인 에스모드의 수업은 크게 3가지로 구분돼 진행된다. 첫째는 의상의 스타일을 창조하고 디자인하는 과정이다. 이곳에선 스틸리슴(stylisme)이라고 부른다. 의상의 테마를 정하고 스타일화를 그린 뒤 소재와 색상 선택 등 제작 직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가리킨다. 두 번째로는 모델리슴(mod´elisme) 과정이다. 직접 천을 자르고 재봉과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 나머지 한 과정은 이론 수업이다. 미술 복식사 예술사처럼 창조적인 작업에 필요한 지식에서부터 마케팅과 세일즈처럼 현업에 필요한 실무지식까지 가르친다. 이 3가지 수업은 똑같은 비중으로 나눠진다.
학년별로 수업의 내용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1학년 때는 색채와 소재에 대한 이해 등 기초 이론과 테크닉을 배운다. 2학년 때는 창의성을 키우는 스틸리슴에 좀 더 비중을 둔다. 3학년은 학업을 완료하는 동시에 취업을 준비하는 단계다. 3학년생들은 여성복 남성복 란제리 아동복 무대의상 가운데 자신의 전문 분야를 정한다. 한국에서 4년제 의상학과를 졸업한 박지하(24) 씨는 “한국에서는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마지막 학년이 되면 취업을 위한 기능만을 강조한다”면서 “이곳에선 교수들이 끝까지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고 그 차이를 설명했다.
에스모드 졸업생들은 큰 의류회사나 개인 디자이너, 부티크의 보조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디자이너나 모델리스트를 구하는 기업들의 구인 의뢰도 많은 편이다. 1층 게시판의 구인 코너에선 에르메스, 프로모드, 버버리, 프라다 같은 유명 기업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졸업 후 두 달 안에 채용되는 비율이 80%를 넘는다고 학교 측은 귀띔했다.
프랑스에선 대부분 고교를 졸업하고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를 통과한 학생들이 곧바로 이곳에 지원한다. 외국인에겐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이상의 조건을 요구한다. 한국의 4년제 대학 의상학과를 마치면 이곳의 3학년 과정으로 편입할 수 있다. 연간 등록금은 8740유로(약 1000만 원)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서울등 세계19곳에 분교 1년씩 선택해 다닐수도”▼
“단순히 손재주만 좋다고 해서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는 건 아닙니다. 창의성이 있어야 하죠. 그 창의성이라는 것은 다양한 경험에서 나옵니다.”
에스모드의 프랑수아 라베르뉴(사진) 국제담당 처장은 ‘학생들이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에스모드의 장점으로 꼽았다. 파리 곳곳에 있는 박물관, 연중 새로운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 거리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다양한 디자인 숍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 프로 디자이너를 위한 감각과 소양을 쌓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에스모드는 1841년 알렉시 라비뉴라는 디자이너가 만든 학교다. 라비뉴는 패션 디자인 분야에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정착시킨 선구자로 꼽힌다. 마네킹도 패션 수업을 위해 라비뉴가 고안해 낸 것이다.
라베르뉴 처장은 현재의 에스모드에 대해 “국제적인 감각에서 앞선다”는 점을 강조했다. 에스모드는 서울을 포함해 전 세계 19개 도시에 현지 학교를 두고 있다. 대부분 졸업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설립한 학교다. 학생들은 각각 다른 나라에서 1년씩 공부하는 식으로 3년 학위 과정을 마칠 수도 있다.
매년 에스모드 파리에 지원하는 학생은 70개국에서 1000여 명에 이른다. 얼마 전에는 중국의 한 도시로부터 학생 4000명을 한꺼번에 받아 줄 수 없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라베르뉴 처장은 “등록금을 낸다고 해서 모든 학생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학시킨다는 것.
그는 “기업들은 에스모드 졸업생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는데 그런 기업들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에스모드 파리의 재학생은 프랑스 학생과 외국인 학생이 반반이다.
에스모드는 패션산업의 마케팅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최근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개설했다. 라베르뉴 처장은 “제작 과정을 경험하고 회사 업무에 필요한 지식도 쌓는다면 패션 분야에서만큼은 일반 MBA 출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