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들을 연구해 온 심지연 경남대 교수는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들의 잘잘못을 평가하기에 앞서 그들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증언부터 확보해야 한다”며 “그러나 이를 정부가 어떤 의도성을 갖고 유도하기보다는 개별 연구자들에게 맡겨 둬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광복 60주년이 지났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여전히 실종 상태인 인물이 많다.
심지연(沈之淵·정치학) 경남대 교수는 해방공간의 역사적 미아들의 발자취를 추적해 온 학자다. 그가 최근 해방공간에서 좌파 최대 이론가로 꼽히는 이강국(李康國·1906∼1955)에 대한 연구서를 펴냈다. 이번 책 ‘이강국 연구’(백산서당)는 ‘박헌영 노선 비판’(공저), ‘잊혀진 혁명가의 초상: 김두봉 연구’, ‘허헌 연구’에 이은 4번째 사회주의 계열 인물 연구서다.
그가 유독 사회주의 계열 인물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뭘까.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연구실에서 심 교수를 만났다.
“해방공간에서는 수많은 정치 노선이 투쟁을 벌였습니다만 현실에서 패배한 노선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아예 절멸되거나 자료도 없이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역사적 선택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먼저 그들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심 교수는 정부가 과거사 진상 규명에 앞장서서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권력에 의한 역사 쓰기’라면서 강력히 비판했다.
“역사는 연구자들의 자발적 의식과 연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쓰여야지 국가가 특정 방향으로 몰고 가며 연구비를 지원하고 그런 연구를 장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정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정의가 이뤄지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심 교수는 자신이 연구했던 사회주의 계열 지도자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는 남한 공산주의운동가 중 거두였던 박헌영에 대해선 지나친 과격성으로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좁힌 자충수를 뒀다고 비판했다. 또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주석이자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국회의장)을 지낸 김두봉에 대해선 “학자(언어학자)로 남았다면 더 훌륭했을 인물”로 평했다. 남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과 김일성종합대 총장을 지낸 허헌에 대해선 “양심적 변호사로서 일제강점기에 가장 치열하게 투쟁을 벌인 사회주의 계열 젊은이들에 대한 도덕적 부채 의식 때문에 좌파를 선택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KBS 1TV 주말드라마 ‘서울 1945’가 주인공 최운혁의 모델로 삼았다는 이강국은 어떨까. 심 교수는 이강국과 김수임을 모델로 한 소설과 드라마가 사실보다는 지나치게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며 아직은 평가보다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강국은 해방공간에서 활약했던 최고의 공산주의 이론가였다. 그는 광복 직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가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조직부 집행위원,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내며 1년여 만에 좌파의 대표 논객으로 떠올랐다.
이강국은 광복 직후 박헌영과 함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주창하며 조선공산당의 주도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한 ‘8월 테제’를 작성했다. 또 그는 인공의 정통성 주장, 임시정부와 인공의 통합 운동, 좌파의 반탁에서 찬탁으로의 노선 전환, 좌우합작과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3당 합당의 주요 논리를 개발하고 발표한 주역이었다.
심 교수가 이강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그가 반탁에서 찬탁으로 전환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유일한 좌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남한 좌파들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급변한 노선 변경은 소련과 북한 노동당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박헌영 등은 이를 합리화하기에 바빴습니다. 반면 이강국은 ‘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해 삼천만 민중에게 깊이 사과한다’며 ‘좀 더 자세히 검토한 결과 조선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현실적 방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차분한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국제적 감각과 정연한 논리를 갖췄던 그도 소련의 비밀 지령에 따라 결국 갈지자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가 돌연 이를 비판하며 좌익정당 통합 운동으로 전환한 것이나 미군정의 좌우합작 노력을 지지하다가 이를 파기한 뒤 전면적 대결 노선으로 전환한 것 등이 그렇다.
더욱이 1946년 9월 월북한 뒤 북한의 임시정부기관이었던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까지 지냈던 그의 비참한 말로는 지식인의 뒷모습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이강국은 6·25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 때 희생됐다. 북한의 공판 기록에 따르면 일제의 탄압과 모진 고문을 버텼던 그가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을 위해 바쳤던 세월을 한갓 출세주의였다고 스스로 비하하고, 해방공간에서의 투쟁을 미제의 주구로 암약했던 것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 동지였던 박헌영과 이승엽을 미제의 간첩이라고 고발했다.
“자신이 평생 추구해 왔던 가치를 송두리째 부인한 채 죽음을 맞아야 할 삶이라면 차라리 남한에 남아 투쟁하다 처형당한 김삼룡과 이주하, 이현상의 삶보다 못한 것 아닐까요. 그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도로 지식인으로서 신념까지 박탈당한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그저 치욕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심 교수의 연구실 창밖 저 멀리 북악산을 화려하게 수놓은 벚꽃의 무리가 왠지 서글프게 다가섰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강국과 김수임의 진실은?
동아일보 1925년 3월 6일자 각급 학교 우등 졸업생 소개 기사에 실린 이강국(오른쪽)과 고유섭. 보성고보를 졸업한 두 사람은 나란히 경성제국대 법문학부에 진학하는데, 법과에 들어간 이강국은 공산주의 이론가가 되고 문과에 들어간 고유섭은 한국의 대표적 고고미술사학자가 된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역사학자는 “사람이 태어나서 사랑하다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강국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사랑(戀愛)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마타하리’로 각인된 김수임의 애인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강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유명세를 탄 수재였다. 1925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 보성고보 최우등 졸업생으로 훗날 고고미술사학자가 된 고유섭과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이강국은 뛰어난 머리 하나로 보성고보를 수석졸업하고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독일 베를린대 유학까지 다녀와 국제적 감각까지 갖췄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강국을 본떴다는 ‘서울, 1945’의 주인공 최운혁과 전혀 다른 면모가 숨어 있다. 그가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돈으로 300만 원대의 재산을 갖고 있던 처가의 도움 덕분이었다. 이강국이 1935년 독일에서 돌아와 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는 데도 처가의 재력이 큰 몫을 했다. 그는 이후 처남 조준호가 운영하는 증권회사의 임원으로 지내며 이주하를 도와 원산의 적색노조활동을 경제적 사상적으로 지원했다.
이강국과 김수임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료가 엇갈린다. 김수임은 1950년 남한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돼 6·25전쟁 발발 직후 사형당했고, 이강국은 5년 후 북한에서 역시 간첩혐의로 처형됐다.
북측 기록은 이강국이 애인 김수임을 통해 그녀와 동거한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에게 접근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고, 남측의 재판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대체로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 등을 통해 얻은 남측 군사정보를 이강국에게 넘겼다고 봤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김수임이 베어드를 이용해 상당한 간첩활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