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국민경제 최후의 보루답게 보수적이다. 조직문화도, 직원들도, 일하는 행태도 그렇다. 답답한 분위기가 싫어 한은을 그만두는 직원들도 있다. 이런 한은에서 40년을 근무한 이성태 총재가 이달 초 취임사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중앙은행은 때에 따라서는 불확실성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총재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총재님의 주장을 비판하는 교수들이 있어서요”라고 물었다. ‘금융통화정책은 위험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보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경제학자 P 씨의 말을 전했다. 물론 이 총재에게 P 씨의 실명(實名)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 총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나서 확신을 갖고 결정하려다 보면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정책은 신중하게 추진하되 실기(失機)해선 안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필자가 “이 총재의 말씀은 성장 지향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더 잘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정책이 나오면 ‘그 정책이 좋은가, 나쁜가’만 따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행태는 ‘가만히 있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의 장단점도 따져 봐야 정책 추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참여정부는 21세기 성장정책으로 한미 FTA 추진을 들고 나왔다. 찬성론자들은 이득을, 반대론자들은 손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FTA 체결로 천국(天國)이 된다든가, 정반대로 지옥(地獄)이 된다는 선전선동은 운동가에게 맡기자. 이럴 때는 역시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잠재하는 수익과 위험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여 국민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FTA 체결에서 얻을 건 뭔가. 전문가들은 재화와 서비스시장의 통합에 따른 획기적인 시너지 효과를 제시한다. 소비자 후생과 소득의 증가다. 또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보호주의 강화 등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보험 혜택’도 있다. 한미동맹 강화에 따른 지정학적 이득도 크다. 위험 역시 만만치 않다. 최근의 아이슬란드 외환위기에서 보는 것처럼 투자의 과잉 확대가 금융 불안과 경상수지 악화로 이어지면서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또 경쟁에 뒤처지는 그룹이 늘면서 양극화가 심해질 수 있다.
FTA 미(未)체결의 득실을 보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Do nothing)’ 전략의 수익은 현 상태를 유지하며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위험은 이 전략이 강한 관성(慣性)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전략은 현재에 집착하는 퇴행적 수구(守舊)가 되기 십상이다. 19세기 말 조선왕조처럼 말이다.
우리는 1960년대 이후 위험을 감수하면서 다양한 성장정책을 펼쳐 왔다. 시대 여건에 맞춰 수출지향 공업화, 중화학공업화, 개방화 전략을 써 왔다. ‘무엇이든 하자(Do anything)’라는 전략에 가깝다. 성장전략의 성공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국민의 의지와 역량에서 나왔다. 가만히 앉아서 오늘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된 게 아니다.
국민은 이제 21세기에 맞는 성장전략은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 보고, 한미 FTA라는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해야 한다.
임규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