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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무비 다이어리]‘매치 포인트’ 불륜남녀의 결말

입력 | 2006-04-20 03:06:00

사진 제공 CJ엔터테인먼트


《런던에 사는 전직 프로 테니스 선수 크리스는 가난하다. 하지만 신체 건강하고 잘생긴 외모에 교양까지 갖췄으니 부잣집에 장가가면 팔자가 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류층 테니스 클럽 강사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 결국 재벌가 아들 톰과 친하게 되고 마침내 그의 여동생 클로에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톰의 약혼녀 노라라는 복병이 나타난다. 크리스는 섹시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어쩌랴, 노라는 가난한 배우 지망생 아닌가. 하지만 크리스는 노라에 대한 욕정을 억누를 수 없었고 노라가 톰의 부모에게 망신당한 날, 위로해 준답시고 노라와 하룻밤 격정을 치른다.

그걸로 끝이었다. 얼마 뒤, 노라는 파혼을 당하고 크리스는 클로에와 결혼, 장인 회사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며 꿈에 그리던 영국 상류 사회 진입에 성공한다.

하지만 노라에 대한 그리움은 식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노라와 재회한 크리스는 타산적인 결혼이 주는 공허함을 노라에게서 채우려 했고 노라 역시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다 노라가 덜컥 임신을 하면서 크리스에게 이혼을 재촉하고 갈수록 거세지는 그녀의 집착은 결국 크리스를 사면초가로 몰아넣는데….

우디 앨런이 만든 ‘매치 포인트(match point)’는 줄거리만 보면 흔한 불륜이지만 두 주인공의 엇갈린 삶의 결말은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노라와 크리스의 삶은 너무 불공평하다. 권선징악을 거부하는 영화를 보며 불편해하는 관객들에게 우디 앨런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아니, 그럼 인생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세요?”

감독은 도덕적인 선인과 악인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승자와 패자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와 비합리투성이’ 현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해진 룰대로 내숭 떨며 각본대로 모나지 않게 살지 않고 룰에 저항하고 의문을 가져 본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상상력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고급스럽고 세련되고 화려해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 보면 음모가 드리운 음습함이 숨어 있다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은 겉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조롱하고 냉소하는 방식으로 ‘해체’해 틀과 액자 바깥의 세상에 주목하는 것(부산대 이왕주 교수)이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알고 있는 규칙이나 법칙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생각을 빌리면,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언명은 현실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이기적인 도그마일 뿐이다.

더구나 과학적 연구결과조차 조작될 수 있고 연예계 닭살 커플이 사실은 별거 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제 쉽사리 속지 않는다. 거짓에 익숙해진 똑똑한 현대인들은 갑자기 부자가 된 흥부가 혹 살해당하지는 않았는지, 신데렐라는 혹 이혼당하지 않았는지 같은 ‘권선징악’ 그 후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동화는 판타지(fantasy)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판타지가 현실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통해 꿈을 꾸고 치유를 받았다. ‘매치 포인트’는 이제 우리 삶이 영화적 판타지조차 용납할 수 없는 진공상태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불이 켜진 극장 안에 난데없이 ‘돈 많은 클로에와 매력적인 노라 중 누구를?’이라는 설문지가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당연히 클로에지!” 하고 크게 말했다. 왁자하게 동조의 웃음이 번졌다. 현실은 그런 것이었다. 영화 속 불쌍한 노라는 현실 속에서도 차갑게 버림받았다. 나의 몸은 어둠 속 극장을 나와 밝은 바깥으로 나왔건만, 마음은 그대로 어둠이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