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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문 직업학교를 가다]프랑스 향수학교 ISIPCA

입력 | 2006-04-22 03:03:00

학생들이 향수 실험실에서 블로터에 향을 찍어 특성을 파악하고 있다. 조향사 과정에서는 2년 동안 350가지 향을 구분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 향을 섞어 새로운 향수를 만드는 실습을 반복한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1828년 피에르 프랑수아 파스칼 겔랑이라는 사람이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근처 리볼리 거리에 향수 가게를 열었다. 겔랑은 향을 조합해 새로운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調香師)이기도 했다. 이 작은 가게에서 시작된 브랜드가 바로 프랑스의 대표적 향수 브랜드인 ‘겔랑’이다.

이후로 겔랑 가문은 대를 이어 회사를 운영하거나 향수와 관련된 다른 일을 하면서 향수 명가로 자리 잡았다. 겔랑 가문의 일원인 장 자크 겔랑도 가문의 전통을 따랐다. 1970년 베르사유에 조향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한 것.

처음에는 향수 쪽으로만 특화된 학교였으나 화장품, 식용향료 쪽으로 과정을 넓혀 1984년 ISIPCA(Institut Sup´erieur International du Parfum, de la Cosm´etique et de l'Aromatique Alimentaire)라는 학교로 거듭났다. 학교 이름은 ‘향수, 화장품, 식용향료 국제고등학원’ 정도로 번역된다.

학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살았던 17세기부터 향수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곳에 학교 터를 잡은 셈이다.

벚꽃이 지기 시작한 지난 주말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는 고풍스러운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한적한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라곤 전혀 없는 조용한 곳이다.

직원의 안내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향수 실험실. 들어서자마자 진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블로터(냄새의 판정을 위해 사용하는 종이)에 여러 가지 향을 번갈아 묻혀가며 향을 맡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향은 천연향과 화학향을 합쳐 수백 가지.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이 가운데서 적어도 기본적인 350가지 향을 구분해낼 수 있도록 훈련을 받는다. 학생들은 또 각각의 향을 조합해 새로운 향을 만들어내는 실습을 반복한다.

졸업을 앞둔 카랑 부아튀스(25·여) 씨는 “매주 한 번씩 테스트를 받기 때문에 350개 향을 거의 대부분 구별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아튀스 씨의 목표는 졸업 후 향수 원액을 제조하는 회사에 취업하는 것.

화장품 실험실은 조그마한 화장품 제조공장이었다. 각종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재료들이 캐비닛에 차곡차곡 정돈돼 있었다. 이곳에서는 립스틱 마스카라 크림 등 시중에 파는 모든 종류의 화장품을 만들 수 있다.

유일한 한국인 학생인 이윤경(24·여) 씨는 “직접 만든 아이섀도를 친구들에게 나눠줬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내친 김에 몇 가지 화장품을 더 만들어 얼마 전 방학 때 한국에 가서 가족과 친척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식품향료를 만드는 실험실은 커다란 주방과 연결돼 있다. 만든 향을 곧바로 음식에 적용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학교에는 이 밖에도 화학분석실, 미생물분석실 같은 실험실이 잘 갖춰져 있어 전체적으로 연구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외국 학생 지도를 책임지는 애니 토힐 씨는 “실습 위주로 교육 프로그램이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론 수업도 마케팅이나 위생학, 관련 법규 등 실용적인 내용 위주다.

외부 기업들과 연계해 학생들에게 현장 경험을 쌓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발달돼 있다. 조향사 과정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두 달 배우고 향수 회사에서 두 달 일하는 식으로 교육 과정을 이수한다.

셀린 파스키에(22·여) 씨는 지난달까지 남부 그라스에서 현장 실습을 했다. 니스에서 가까운 그라스는 유명 브랜드에 완제품 직전의 배합 향수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모여 있는 향수의 메카다. 파스키에 씨는 “배운 것을 곧바로 실전에 응용해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는 총 13종류의 학위 과정이 개설돼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한국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조향사 학위 과정으로 2년제다. 학위를 딴 학생들은 샤넬, 디올 같은 큰 화장품 브랜드나 그라스에 있는 것과 같은 향수 회사에 취직해 연구나 생산 파트에서 일한다. 식품향료 쪽에 집중한 학생들은 식품회사로 진로를 택한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외국인 학생을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2년제 마스터 과정이 개설돼 있다. 이 과정은 한국으로 치면 대학원에 해당한다. 조향사처럼 직접 제조를 하는 인력이 아니라 마케팅, 컨설팅 등 사무직으로 진출하려는 사람을 양성한다. 화학, 생물학, 약학 학사학위 소지자 위주로 지원을 받는다.

이윤경 씨가 다니는 과정도 여기다. 영국 런던대에서 제약학을 공부한 이 씨는 “1학년 때는 향수와 화장품 제조 메커니즘을 배우면서 실험실 수업을 많이 하고 2학년 때는 회계 마케팅 세일즈 등 매니저가 되기 위한 과정에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워낙 향수에 관심이 많고 화장품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수업료는 과정별로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연 1만 유로(1170만 원)가량. 서류와 인터뷰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지만 과정에 따라 입학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교육담당 디렉터 귀므리씨
“졸업작품 발표회서 채용 많아요”

“프랑스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일한 학교랍니다.”

ISIPCA의 직원들에게 이런 학교가 프랑스에 많으냐고 물어 보면 곧바로 이런 답이 돌아온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놀랄 만큼 강했다.

교육 담당 디렉터인 리디 귀므리(사진) 씨는 “향수에 관한 한 정식 교육기관으로선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향수회사에서 부설로 운영하는 학교가 더러 있지만 이렇게 업계에서 인정받는 학위 과정을 갖춘 학교는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만큼 이 학교 출신에 대한 업계의 선호도는 높다고 귀므리 씨는 자랑했다. 졸업 후 1년 이내 취업하는 비율은 80∼90%.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일자리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다.

매년 6월에는 졸업반 학생들이 졸업 작품 발표회를 연다. 향수, 화장품, 식품향료를 각각 만들어 학교 사람들뿐 아니라 외부 손님들에게도 선보이는 행사다. 이 행사에는 매년 향수, 화장품, 식품업계 관계자들이 500명 이상 참석한다. “졸업 작품을 보고 사람을 뽑기 위해 오는 사람이 상당수”라는 게 그의 설명.

귀므리 씨는 학교의 강점으로 실습과 현장 위주의 교육을 꼽았다. 생산 파트로 진출하지 않는 학생들도 실습을 통해 생산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마케팅이나 세일즈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그가 소개한 졸업생의 현직 현황을 보면 독일 향수회사의 개발 담당 매니저, 아랍에미리트 화장품회사의 중동 담당 세일즈 매니저, 러시아 식품회사의 마케팅매니저 등 진출 분야가 다양했다.

귀므리 씨는 “교수진 구성도 실무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모두 220명인 교수 가운데 외부 강사는 80%에 이른다. 외부 강사는 모두 향수나 화장품, 식품 업계 현직에 있는 전문가들이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