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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대입논술 A~Z]논지 설정

입력 | 2006-04-25 03:03:00


지난번에 섬세한 논지 설정이 당락을 가른다고 하였지요? 논제 파악에서 다루었던 문제에 실제로 한번 접근해 봅시다. ‘개인들 간의 관계에 관한 예시문의 논지를 활용하여, 국가들 간의 관계를 국제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정당한가에 대하여 구체적 사안을 들어 논술하라.’

이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논지는 정말 다양합니다. 필요성과 정당성 모두를 긍정하는 입장, 부정하는 입장, 둘 중 하나만 인정하는 입장 등 최소한 네 가지 선택지가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긍정할 경우에도, ‘필요하다, 그리고 정당하다’며 둘 다를 비슷한 차원에서 인정하는 입장과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당하다’며 둘을 연결시켜 필요성을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으로 다시 나뉠 수 있습니다. 또 필요성은 긍정하고 정당성을 부정할 경우에도 한 가지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지요. ‘부당하지만 필요하기에 필요악이다’는 입장도 가능하지만, ‘규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의 규제는 강대국 위주로 정당하지 않다. 따라서 정당한 규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혹은 아예 ‘구체적 사안을 들어 논술하라’는 부분에 착안하여 사안을 나누고 사안에 따라 필요성과 정당성을 달리 논의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나 핵문제 같은 군사 문제는 규제가 필요하고 정당하지만, 무역이나 투자 같은 경제 영역에서는 규제가 필요하지도 정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가능한 논지를 빠짐없이 검토하는 과정이 논지 설정에서 꼭 필요합니다.

섬세하게 접근하는 것 외에도 두 가지만 더 강조하겠습니다.

첫째, 주어진 논점에 맞추어서 자신의 입장을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우선 주어진 물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한 대답 없이 ‘해결해야 만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 논점 일탈을 범한 것입니다. 이런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주어진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논지로 삼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논지를 표현하는 주제문이 짧게는 한 문장, 길게는 두세 문장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서 독자가 글쓴이의 결론적인 주장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또 하나, 절충적 입장이나 ‘둘 다 틀렸다’, ‘둘 다 맞다’ 식의 논지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까딱 잘못하면 명확한 입장이 없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으니 특별한 경우 외에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자신의 입장을 과감하게 주장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같은 틀로 찍어낸 붕어빵 같은 논술 답안은 채점자를 식상하게 할 따름입니다. 억지로 튀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자기 생각이 일반적 주장과는 다른 소수파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인정된 의견만 따르다 보면 발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논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최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대입 논술 문제에서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일부를 제시문으로 주고 세 등장인물을 평가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제시문에서 랑베르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도망가려는 사람, 신부 파늘루는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해석하여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 의사 리유는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세 인물에 대하여 어떤 평가가 가능할까요? 아마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리유를 높이 평가하고 랑베르를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정답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관점과 개인주의적 인생관을 옹호하면서 랑베르를 지혜로운 인물로 평가할 수도 있고, 종교적 세계관이나 인생에 대한 겸손한 관점을 제시하면서 신부 파늘루를 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결론을 설득력 있게 정당화할 수만 있다면 어떤 입장이건 허용되는 것이 논술입니다. 논술이라는 ‘ 자유의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펼쳐 보기 바랍니다.

박정하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EBS 논술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