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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 교수 평전 ‘항일노동운동의…’ 펴내

입력 | 2006-04-25 03:03:00

이성규 서울대 교수


외할아버지는 뼈대 있는 달성 서씨 약봉 종가의 후손이었지만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스스로가 양반 출신임을 부정하고 상놈을 자처했다. 호남지역에서 소작농과 백정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던 그는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101명 중 한 사람일 만큼 좌파로 분류됐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추진한 신간회 운동이 좌파의 탈퇴로 와해되면서 그는 우파로 이동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해 반탁·반공운동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6·25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뒤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난한 농민의 샘이 되겠다고 호를 농천(農泉)이라 한 서정희(徐廷禧)다.

그가 납북될 때 네 살이었던 외손자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을 외할아버지의 삶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열강의 조선 침략의 시발점이라 할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1950년에 실종…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를 외할아버지의 삶은 관통하고 있었다.

광복 직후 찍은 서정희 씨의 모습
독립협회 활동, 을사오적 암살 기도, 3·1운동, 1920년대 노농운동과 조선공산당 사건, 1930년대 신간회 활동, 광복 후 반탁운동, 제헌국회 참여 등 굵직한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을 지켰던 서정희. 6·25전쟁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된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진 제공 지식산업사

중견 역사학자로 성장한 손자는 외할아버지의 행적 찾기에 나서 10여 년의 노력 끝에 그의 평전을 내놓았다. 이성규(60·동양사) 서울대 교수가 최근 펴낸 ‘항일노동운동의 선구자 서정희’(전 2권·지식산업사)다.

“할아버지가 남한에서 국회의원을 하셨다지만 광복 이전엔 좌파로 소문이 난 데다 납북된 것도 쉬쉬해야 했던 시절이 길었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남은 자료가 없어 공판기록, 신문기사, 관련 연구서를 죄다 찾아 읽어야 했습니다. 역사학자라 해도 전공이 중국사인 데다 우리 때 어디 한국 근현대사를 학교에서 따로 배운 적이 있나요. 그저 어깨 너머로 배웠던 정도였으니….”

2003년 돌아가신 어머니와 외가 식구의 글 독촉을 받으면서도 허술한 역사서를 쓸 수 없다는 소신 때문에 고군분투를 벌인 게 10년 세월을 넘겨 버렸다. 사실 독립운동가로서 외할아버지의 경력은 화려했다. 제헌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 다음으로 고령이었던 서정희는 이승만과 독립협회 활동을 같이했고 1907년 훗날 대종교를 창건하는 나철과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다가 발각돼 진도로 유배를 다녀왔을 뿐 아니라 3·1운동,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수많은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손자의 평가는 냉철했다.

“할아버지는 사상가도 못되었고, 정치인이라 하기엔 수완이 부족했습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평생 정말 사리사욕 없이 남을 위해 뭔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뛰어다니신 분이셨습니다.”

서정희는 사회운동을 한다며 가산을 탕진한 것도 모자라 평생 집에 생활비 한 번 가져다주지 못한 위인이었다.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가는 이 책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1931년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 임원들이 솔선수범으로 성금을 갹출할 때 그가 내놓은 것이 자신이 입고 있던 솜바지와 저고리였다.

이 교수가 주목한 것은 그런 빈궁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기록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독립운동 혐의로 유치장 신세를 한 번 질 때마다 얼마나 모멸적인 상황에 처하는지, 또 그 가운데서 좌우 갈등을 넘어 어떻게 인간적 정을 나누는지, 그러다 실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가득하다.

이 교수는 그런 정신에서 일가의 치부까지 드러냈다. 자신의 큰외삼촌이자 훗날 양심적 야당의원으로 꼽히는 서범석과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큰 이모부가 일제강점기 말기에 만주국 관료로 변절했으며, 이 때문에 서정희가 아들과 사위인 이들에게 수시로 절연의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까지 낱낱이 밝혀 놓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온 시절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고통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기에 앞서 이성적 비판에만 나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물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역사 연구에 필요하지만 그건 소수 역사학자의 몫이지 모든 사람이 나서서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할아버지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지만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분께 바칩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