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부터 이틀 일정으로 러시아와 독일의 정상회담이 시작됐다. 최근 양국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듯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정상회담 장소가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수도 모스크바나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톰스크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 있는 인구 50만 명의 소도시다.
정상회담과 함께 러-독 경제포럼도 열리고 있다. 양국 경제부처 장관 및 독일의 바스프와 지멘스, 러시아의 가스공사(가스프롬)와 철도공사 같은 대기업 경영진 수백 명이 참석했다.
두 정상을 비롯한 양국 고위인사들이 굳이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나 걸리는 톰스크에서 모인 이유는 뭘까?
표면적으로는 과학기술과 시베리아 자원 개발의 중심지인 이 도시가 에너지와 과학기술 분야 협력을 논의하기에 적당한 장소라는 것이다. 톰스크는 옛 소련 시절부터 핵과 우주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비밀연구소들이 모인 과학도시였다. 또 인근에 유전과 가스전이 많다.
하지만 알고 보면 톰스크는 양국 간의 불편한 과거사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1만5000여 명의 독일계가 살고 있다. 독-소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서부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소련은 우수한 독일계 인력을 시베리아 개발에 활용했다. 빅토르 크레스 현 톰스크 주지사부터 독일계다. 그의 부모도 1940년대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왔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독일은 오히려 이곳을 시베리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아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번 정상회담 중 시간을 내서 독일계 주민들을 만났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불행했던 60여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꺼내기보다는 ‘미래의 땅’인 시베리아에서의 협력을 다짐하는 데 초점을 뒀다.
러시아와 독일의 과거사를 한국-일본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의 ‘톰스크 회동’을 보면서 과거사를 헤쳐 나가는 지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역시 지도자의 몫이 크다.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