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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금강산에 박제돼 버린 윤이상 선생의 음악혼

입력 | 2006-05-02 02:59:00


찬란한 신록과 꽃이 어우러진 금강산은 상큼했다. 왜 봄의 금강산을 여름(봉래산), 가을(풍악산), 겨울(개골산)과 달리 본 이름인 ‘금강산’으로 부르는지 알 만했다.

기자는 금강산 여행이 시작된 직후였던 1999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금강산을 찾았다. 그때는 강원 동해시에서 출항해 10시간 이상 배를 타고 찾아갔던 길을 이제는 차를 타고 육로로 20여 분 만에 도착했다. 온정리 해금강 호텔 주변에는 유럽풍의 호텔들도 많이 생겨 풍광이 사뭇 달라졌다. 횟집, 나이트클럽, 노래방도 생겼고, 24시간 편의점에서 남한 신용카드를 이용해 캔 맥주를 살 수도 있었다. 별천지 같은 금강산은 마치 거대한 철조망에 둘러싸인 테마파크처럼 보였고 온정리 마을 북한 주민들의 무표정한 모습은 SF영화 속 배경처럼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난달 29일 밤 금강산에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95·사진) 선생을 추모하는 ‘윤이상음악회’가 열렸다. 무대에는 평양 윤이상 음악연구소 연주단과 인민배우 등 북한 예술인이 참가했지만 객석에서는 일반 북한 주민들을 찾기는 어려웠다. 윤이상평화재단의 초청으로 관광버스를 타고 온 230여 명의 남한 정치인, 기업인, 보도진과 관광객들로만 가득차 아쉬웠다.

이 음악회는 1988년 7월 윤 선생이 휴전선에서 남북한 주민들이 음악을 통해 맘껏 즐기고 교류하자며 제안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계승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휴전선이 아닌 ‘남북 화해와 교류의 상징’인 금강산에서 열린 이번 음악회는 왠지 모르게 ‘박제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윤이상평화재단 측은 음악회 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북합동음악회’라는 명칭을 내걸면 북측에서 허가를 얻기가 복잡해 남측 주최 음악회에 북측 연주단을 초청한 것일 뿐 ‘남북합동’이란 표현을 삼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분단의 아픔을 자신의 삶으로 삭여 냈던 윤 선생. 그는 “정치 이데올로기는 길게 보면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했다가, 착색되고, 낙엽이 지는 것이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엄숙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 파란 하늘, 정치 이데올로기와 민족…. 금강산에서 더욱 깊이 되새겨볼 수 있었던 단어들이었다.

금강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