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대의 교수와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강의당 평균 학생이 13명인 이 대학의 강의는 대부분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사진 제공 리드대
《“내가 리드대에서 서체(書體)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 컴퓨터의 ‘아름다운’ 글꼴을 디자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애플컴퓨터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51) 사장은 지난해 6월 초청받은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이렇게 축사했다. 잡스 사장은 리드(Reed)대에 다니다 비싼 학비 때문에 6개월만에 자퇴한 뒤 1년 6개월 동안 청강생 신분으로 리드대에서 공부했다. 이때 그가 들은 강의 가운데 하나가 서체 강의였으며 10년 뒤 매킨토시 컴퓨터의 폰트(글꼴)를 디자인할 때 토대가 됐다는 설명이다.
미국 북서부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 동남쪽의 조용한 숲 속에 자리잡은 리드대. 리드대는 설립자인 시미언 가넷 리드와 어맨다 리드 부부의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시미언 가넷 리드는 오리건 주에서 활동한 사업가였다.》
기자가 찾아간 4일 리드대의 캠퍼스 광경은 다른 대학과 사뭇 달랐다. 모여서 깔깔거리며 얘기하는 학생들도,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고 몸을 흔들어 대는 학생들도 없다. 정치 문구들이 어지럽게 적힌 대자보나 플래카드도 없다.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학생보다는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학생이 더 많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듯한 식당에서도 혼자 앉아 책을 읽는 학생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 대학이 ‘책 읽기를 좋아하고, 생각하기를 즐기며, 지성인이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도가 높다는 소문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들은 이 학교의 오랜 전통을 보여 준다.
교양(리버럴 아츠) 중심 대학으로 설립돼 100년 가까이 석박사 과정 없이 학부 교육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 대신 학부생을 박사과정을 밟은 학생 못지않게 깊이 있는 지식인으로 만들어 낸다.
일단 입학하면 먼저 1년 동안 그리스와 로마 고전(古典)과 씨름해야 한다.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깊이 있고 폭넓은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교양’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헤로도토스의 ‘역사’, 플라톤의 ‘공화국’, 아우구스투스의 ‘고백록’ 등 고전 40여 권을 읽어야 한다. 제대로 읽지 않고 줄거리만 파악하고 강의에 들어갔다가는 교수의 호된 핀잔을 각오해야 한다.
이처럼 엄청난 독서량은 1학년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학생이 1주일에 총 500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는다.
또 4학년이 되면 1년간 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1년간 지도교수와 매주 1시간씩 의무적으로 면담한다.
논문 제출 시한이 다가오면 4학년 학생들은 ‘논문의 탑’에서 밤을 지새운다. 3층짜리 도서관 건물 꼭대기 탑 내부에 꾸며 놓은 ‘논문의 탑’. 이곳에는 세계 최초의 생태시인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게리 스나이더,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산 제1봉을 정복한 앨런 블럼, 베스트셀러 작가인 재닛 피치 등 그동안 리드대 졸업생들이 제출한 수만 권의 논문이 채워져 있다.
기자가 찾아간 이날도 책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10여 명의 4학년 학생이 논문심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논문을 제출하고 나면 4명의 교수와 2∼3시간 동안 문답식으로 진행되는 논문심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리드대의 또 다른 특징은 모든 강의가 교수와 학생 간의 대화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강의당 평균 학생도 13명에 불과하다. 교수들은 가르친다기보다는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는 참가자 중 한 명이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학생이다. 교수도 학생도 학문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교수는 학생이 스스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1학년생 애덤 본디 씨)
1988년부터 이곳에서 중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유형규(柳亨奎·중국학과) 교수는 “교수들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은 학생들이 강의 전에 스스로 책을 뒤져 가며 찾아와야 한다”며 “어찌 보면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 이런 과정이 학생들의 지식의 폭을 넓혀 준다”고 설명했다.
수학과 자연과학도 학생들의 논리와 사고를 개발하는 학문이다. 컴퓨터공학, 생명공학 등 응용과학은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런 점은 2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982년 리드대를 졸업한 와이어드지(誌) 편집자 게리 울프 씨는 “수학 강의도 ‘숫자란 무엇인가’, ‘1+2는 왜 2+1과 같은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생들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도록 만드는 교육방식이 결국 오늘날의 리드대를 만들었다.
리드대는 졸업생이 박사학위를 받는 비율이 미국 대학 가운데 캘리포니아공대, 하비머드대 다음으로 높다.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아이비리그 교수 중에는 리드대를 졸업한 뒤 다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많다.
또 로즈(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는 유명 장학프로그램) 장학생을 미국 리버럴 아츠 대학 가운데 윌리엄스대 다음으로 많은 31명 배출하기도 했다.
이런 명성을 바탕으로 경영대, 의대, 법대 등을 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피터 스타인버거 교무처장은 “평범한 경영대, 의대, 법대를 가진 대학보다는 최고 수준의 리버럴 아츠 대학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포틀랜드=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다양성-자아실현 방해 대학 순위매기기 거부”▼
콜린 다이버(63·사진) 리드대 총장은 지난해 월간 애틀랜틱 1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대학 순위 매기기가 교육을 왜곡한다”고 비판했다.
대학의 순위를 결정해 발표하는 일이 일상화된 미국에서 이 같은 주장은 학계에 파장을 불러왔다.
이 대학은 10년 전부터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등에 순위자료 제출을 거부해 왔다.
다이버 총장은 그 이유로 3가지를 들었다. 먼저 몇 가지 기준에 맞춰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미국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인 ‘다양성’을 저해한다. 또 대학이 부(富) 또는 명예와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목표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비쳐 ‘자아실현과 지식 추구’라는 리드대의 철학에 어긋난다. 또한 각 대학이 순위를 높이기 위해 자료를 왜곡해도 검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이버 총장은 1989년부터 10년간 펜실베이니아대 법대 학장을 지낸 뒤 2002년 리드대 총장으로 스카우트돼 왔다.
그는 ‘공부하는 것 외에 별다른 재미가 없을 것 같은 리드대에 학생들이 몰리는 이유가 뭔가’라는 질문에 “미국에 지식인이 되려는 학생들이 아직도 많다는 증거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동부의 명문 대학 못지않은 배움터를 세우자’는 설립 취지가 지금껏 유지돼 왔습니다. 이 점이 리드대의 가장 큰 자랑이지요.”
그는 “기숙사의 학생 수용 비율이 60% 정도로 낮다는 게 다소 아쉬운 점”이라며 “재직 중에 기금을 더 쌓아 기숙사 건물을 확충하고 싶다”고 말했다. 리드대의 기금은 평균 5억 달러 수준인 경쟁 대학들에 비해 적다.
포틀랜드=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