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황호택]최은희의 恨

입력 | 2006-05-10 03:02:00


1960년대 중반 텔레비전도 없던 농촌 마을에 가끔 가설극장이 찾아왔다. 전국 극장을 순회한 필름은 흠집투성이여서 화면에 비추면 마치 비가 오는 것 같았다. 필름이 낡아 영화가 돌아가다 끊길 때마다 가설극장은 갑자기 어둠에 묻히고 “빼먹지 말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필자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를 가설극장에서, ‘빨간 마후라’(1964년)를 읍내 극장에서 관람했다. 신상옥 최은희 콤비가 만들어 내는 영화는 가난했던 1960, 70년대 국민 오락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최 씨를 ‘한국 최초의 스타 여배우’라고 평가했다. 최 씨 뒤에 김지미, 그리고 다음에 윤정희 남정임 문희 트리오의 시대였다. 최 씨는 남북한에서 10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세계 영화제 수상 기록은 최 씨가 북한에 있을 때 ‘소금’(1985년)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다.

남편 신 감독과 사별한 최 씨를 3시간가량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1954년 결혼해 52년 동안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산 부부 사이에는 혈육이 없다. 최 씨는 신 감독과 의논해 두 아이를 입양했다. 두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부부가 북한에 납치됐다. 최 씨는 “두 아이가 충격을 이겨 내고 잘 커 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신 감독은 간 이식 수술을 2년 전에 받았다. 처음에는 딸(명희)이 간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크기가 맞지 않았다. 그러자 사위가 나섰다. 사위는 장인 장모가 아내를 잘 길러 준 데 대해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

신 감독이 아들(정균·영화감독)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말한 것이 유언이 됐다. 장례를 치른 뒤 명희 씨와 정균 씨 부부가 교대로 어머니를 수발하고 있다. 기른 자식이 낳은 자식보다 낫다.

신 감독은 최 씨 모르게 바람을 피워 영화배우 오수미(교통사고로 사망)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최 씨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해 걱정하면 신 감독은 “애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 둘이 좋은 영화 많이 만들면 되지”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혼외(婚外)의 두 자녀를 둔 것을 알고 나서 최 씨는 배신감을 못 견뎌 신 감독과 이혼했다.

천생연분이었던지 이들은 북한에 납치돼 재결합했다. 최 씨는 북한에서 신 씨를 용서했다. 상부(喪夫)한 미망인은 “평생 내가 사랑한 남자는 신 감독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부는 북한을 탈출한 뒤 정균 씨와 함께 오 씨의 두 자녀를 미국으로 불러 공부시켰다. 명희 씨는 결혼해 가지 못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희수(喜壽·77세)를 맞은 최 씨에게 “신 감독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서운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정균이가 맏상제 노릇을 잘했어요. 내가 출산은 못했지만 우리 애들이 효도를 해 서운함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최 씨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동석한 지인의 제의로 위스키를 한잔하게 됐다. 최 씨도 술을 조금 마셨다.

그에게 “한국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서 무척 많은 걸 성취했는데 혹시 이루지 못해 서운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내 인생에서 출산 못한 게 가장 가슴에 남아 있지요”라고 말했다.

답변을 듣고 나서 공연한 것을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 눈물을 흘렸는데 또 울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과년(過年)한 딸을 둔 부모들에게서 가끔 중매 부탁을 받는다. 요즘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서른이 넘어 시집을 안 가도 태연하고 고학력 전문직 중에는 30대 중반을 넘겨서도 독신으로 지내는 여성이 많다. 결혼해도 쉽게 갈라지고, 아이 갖기를 늦추다가 기껏 하나만 낳는다.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은 출산과 육아를 해 보지 않은 여성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행복을 넘어 국가에 이바지하는 일이 됐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황호택 논설위원이 신동아에서 만난 '생각의 리더 10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졌습니다.
가수 조용필, 탤런트 최진실, 대법원장 이용훈, 연극인 윤석화, 법무부 장관 천정배, 만화가 허영만, 한승헌 변호사, 작가 김주영, 신용하 백범학술원 원장,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이 시대의 말과 생각
황호택 기자가 만난 생각의 리더 10인

지은이 : 황호택

가격 : 11,000 원

출간일 : 2006년 01월 01일

쪽수 : 359 쪽

판형 : 신국판

분야 : 교양

ISBN : 8970904476

비고 : 판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