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단체의 요구사항을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된 듯하다.” 한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해묵은 의제까지 모두 쏟아내는 일부 단체가 나를 어린이 만화영화의 무소불위 주인공 ‘로봇 태권V’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답답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선거철이면 쏟아지는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는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에서부터 지방의회가 조례를 제정해야 가능한 것까지 다양하다. 실현 가능성과 자치단체의 권한을 따져 보지도 않고 우선 들이밀고 보자는 식의 요구가 적지 않다.》
▽우리 단체만 잘되면=지방의 한 예술단체는 7개항의 예술 관련 정책을 공약에 반영해 줄 것을 도지사 후보들에게 요청했다.
‘문예진흥기금 200억 원 확대’ ‘복합예술문화센터 건립’ ‘문화재단 설립’ ‘도립 예술단 건립’ ‘예술문화 관련 예산 도 예산의 3%로 증액’ ‘시군 창작마을 및 문학공원 조성’ 등이다. 이들 정책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대형 사업이다.
한 도지사 후보 측은 “열악한 지역 예술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항이라고 하지만 한결같이 많은 돈이 필요해 다 들어주기는 무리”라며 “이 정책을 들어줄 경우 다른 중요한 공약에 대한 예산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황당한 민원성 요구도 봇물=형평성과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민원성 요구도 적지 않다.
지방선거 후보들은 “고속철도(KTX) 역사를 만들어 달라”, “인천 광양 같은 자유도시로 만들어 달라”, “도로를 놓아 달라”, “대학을 세워 달라”는 등의 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선거 때 사용한 일정 한도의 광고비는 선거비용으로 처리돼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전액 환불받을 수 있다”며 계간지에 1000만 원을 내고 광고할 것을 요청한 시민단체 간부도 있다.
한 광역단체장 후보는 청소년단체로부터 ‘19세인 선거 연령층을 18세로 낮춰 달라’는 요청과 함께 “대학 등록금 인상의 이유가 무엇인지 답해 달라”는 질의서도 받았다. 이 후보 측은 “선거 연령과 대학 등록금은 지자체장 소관이 아니지 않으냐”며 난감해했다.
한 광역단체장 후보는 “노동단체가 노사정협의회를 강화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국회도 못하는 것을 도지사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일단 요구하고 보자”=질의서나 정책제안서를 내는 많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우리 요구가 100% 관철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노동단체 관계자는 “조금 무리한 질의도 도지사 후보의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가늠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라고 말했다.
후보들은 여러 사회시민단체의 이런 무리한 공약 제안을 정중하게 거부하는 방법에 대해 크게 신경 쓰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제도 개선 의지가 부족하다”고 낙인찍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한 광역단체 후보의 정책팀은 해당 지역의 사회복지연대가 제시한 27가지 복지정책을 검토한 결과 ‘사회복지센터 연간 재정지원’ 등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17가지를 들어주기 힘든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이들 요구에 대해 ‘전면 수용’ ‘부분 수용’ ‘미수용’이란 항목별 답변서에 ‘부분 수용’에 동그라미를 치고 ‘취지 자체에 적극 공감하는 만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적기로 했다.
이 후보의 정책팀장은 “해당 단체가 답변에 대한 평가를 발표한다는데 자신들의 요구를 많이 들어준 후보의 편을 들 것이 뻔하다”면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고 말했다.
후보들은 수용하기 힘든 공약에 대해 ‘관련 부처와 적극 협력하겠다’ ‘예산을 고려해 검토하겠다’는 등으로 피해가는 수법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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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충주=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
창원=최우열 기자 dns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