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아나운서, 교사, 경찰, 공무원 등 사회지도층이 ‘도촬(盜撮·도둑촬영)’을 하다가 들켜 사법처리되는 사건이 잇따라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이 같은 행위를 막아야 할 사람들이 범행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윤리의 방어선이 뚫렸다는 탄식도 나온다.
▽때와 장소,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일본 민방 중 최대 규모인 ‘니혼(日本) TV’의 남성 아나운서(26)가 요코하마(橫濱) 역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여고생의 치마 속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다가 잡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실이 18일 뒤늦게 밝혀졌다. 장래가 촉망되는 인기 아나운서의 기행에 일본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같은 날 오사카(大坂) 경찰청은 현직 교사(40)가 전철역에서 여고생의 치마 속을 비디오 촬영한 혐의로 체포됐다고 밝혔다. 4년 전부터 주 2, 3회 도촬을 해 왔다는 교사의 집에서 비디오테이프 20여 개를 압수했다. 학교에서 징계면직을 당한 이 교사는 “독신으로 욕구불만이 쌓인 것이 원인”이라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13일 나라(奈良) 현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한 초등학생을 실은 구급차 안에서 현직 경찰관(49)이 몰래 아이 어머니의 치마 속을 촬영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직장 컴퓨터에 보관된 외설 사진 중에는 경찰서 안에서 자신에게서 조사를 받던 여성 회사원(31)의 치마 속을 찍은 것도 포함돼 있었다.
요코하마의 시 공무원(35)도 전철역에서 여고생의 치마 속을 찍다가 체포됐다. 도촬당한 것을 눈치 챈 피해 여고생이 일단 집에 돌아갔다가 어머니와 함께 현장에 다시 가 보니 범인이 다른 여학생의 치마 속을 찍고 있어 붙잡았다는 것.
지난달 16일 효고(兵庫) 현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이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 의사(28)가 비디오카메라로 여자 화장실 내부를 촬영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첨단 장비로 신출귀몰하게 한다=도촬은 일본에서도 1년 이하 징역이나 100만 엔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중죄.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전철역에서는 하루 한 명꼴로 도촬범이 잡힐 정도로 빈발하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잡힌 사람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게 일본 언론들의 지적이다.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소형 카메라 등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들키지 않고 촬영할 수 있는 첨단 장비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
이런 도구를 사용한 수법도 치밀해지고 있다. 심지어 여성 도촬범이 빈 샴푸병에 소형 카메라를 장착해 여자 목욕탕을 촬영한 사례도 있다.
전문가는 “도촬범은 마니아형과 영리 추구형으로 나뉜다”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