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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정성희]명품, 뇌물, 허위의식

입력 | 2006-05-23 03:00:00


며칠 전 신문지상에 등장한 명품 뇌물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샤넬 핸드백이나 구찌 머플러를 한두 개 갖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650만 원 상당의 로베르토까발리 밍크코트는 어떤 제품인지 호사가들의 궁금증도 계속되고 있다.

‘럭셔리스(luxuries)’ 또는 ‘럭셔리 브랜드(luxury brand)’를 번역한 것이 ‘명품’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치품’인데 어째서 ‘명품’이라 번역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신은경 씨가 이 물건들을 진짜로 받았는지 아닌지는 궁금하지 않다. 필자는 명품 뇌물 공세가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 여성의 심리를 절묘하게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뇌물을 주는 쪽에서는 정확한 ‘타기팅’을 한 셈이다.

‘심리학의 즐거움’을 쓴 크리스 라반 박사는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가씨들은 브랜드 상품에 열광하지 않는다”면서 “브랜드 상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잘 손질된 가보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유명 브랜드의 가방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가방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인가를 브랜드의 위력으로 메우고자 하는 ‘승인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브랜드가 신제품이거나 한정품일 경우 브랜드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그 가방을 갖고 있는 자신의 가치 수준도 더욱 높아진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품에 기대서 가치를 올리는 것에는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직업을 갖거나 다이어트로 날씬한 몸매를 갖게 되는 것과는 달리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진짜로 자신의 가치를 올린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위력을 ‘빌렸기’ 때문에 실제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제의 신간 ‘90%가 하류로 전락한다’(후지이 겐키 저)에서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다’는 항목이 왜 하류인생으로 떨어지는 지표 중 하나가 되는 것인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물론 한국 여성만 명품광은 아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명품 열풍이 불었다. 일본 긴자 거리를 걷는 여성들은 기저귀 가방도 명품을 사용한다고 하니 말이다. 명품 열기는 일본 한국 홍콩을 거쳐 중국에까지 상륙했다고 하니 전염력도 강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성이 유독 명품에 열광하는 것은 무언가 내면이 크게 결핍돼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듯하다. 모두 유교권 국가들로 수천 년간 남성에 억눌린 때문인지, 아니면 압축 성장으로 인한 물신주의 풍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최근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명품 제조업체들이 동아시아의 엄청난 구매 열기로 환호성을 질러대면서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고 한다. 명품의 전제조건이 ‘희귀성’인데 아무리 비싼 값을 매겨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니 ‘대중적인 제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고 한다.

샹젤리제에 있는 루이비통 매장에 입장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아시아 여성들의 행렬이 파리에서 또 다른 구경거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 행렬에 배낭여행을 온 여대생이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대신 사주고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생도 끼어 있다고 하니, 국부 유출 이전에 이들의 공허한 내면을 본 것 같아 씁쓸하다.

명품 자체에 이런 허위의식이 깔려 있는데 그 명품이 뇌물로 제공된다고 하니 어쩌면 잘 맞는 궁합 같기도 하다.

정성희 교육생활부장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