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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꽃’ 기생들을 눈앞에서 보는 듯

입력 | 2006-05-25 19:38:00

19세기 전반 평양기생들의 면모를 문학적으로 기록한 책인 ‘녹파잡기’의 필사본. 고려대 ‘육당문고’의 ‘서경잡기’ 중 왼쪽에 녹파잡기라는 제목과 그 아래 저자로 한재낙의 호인 우화노인(藕花老人)이 적혀 있다. 사진 제공 안대회 교수


"노을빛 치마는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구름 같은 머리는 드높다. 일찍이 그녀가 의자에 걸터앉아 한 남자로 하여금 버선을 신기게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의기(意氣)가 귀공자의 풍모를 절로 드러냈다."(경연·輕燕이란 기생에 대한 묘사)

"일찍이 봄날의 달빛 휘영청 밝았다. 그녀는 손으로 비단 주렴을 걷어서 달빛을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쓸쓸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나를 보고는 몹시 기뻐하여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라고 하였다."(기생 화월·花月에 대한 묘사)

19세기에 색향(色鄕)으로 유명했던 평양의 기생들을 인터뷰해 그녀들의 삶을 생생히 묘사한 책이 발견됐다.

안대회(한문학) 명지대 교수는 19세기 전반 개성출신의 낙방거사 한재낙(韓在洛)이 쓴 '녹파잡기(綠波雜記)'를 발견, 곧 '한문학보'에 발표할 논문 '평양기생의 인생을 묘사한 소품서 녹파잡기고'에 자세히 소개했다.

녹파잡기는 평양기생 67명과 기방을 무대로 활동한 남성 예능인 5명을 직접 만나 그 재주와 특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신위(1769~1847)와 이상적(1804~1865)이 남긴 글을 통해서 그 존재만 알려졌는데 단국대도서관 '연민장서'에 소장된 복사본과 고려대 '육당문고'에 소장된 '서경잡기'의 일부로 실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실체가 확인됐다. 기생의 평전으로는 일제강점기 이능화가 쓴 '조선해어화사'가 유명하지만 주로 역사상 유명한 기생을 소개한 것으로 이처럼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은 유례가 없다.

제목에 쓰인 녹파는 고려 최고의 시인 정지상이 평양 대동강을 배경으로 지은 한시 '송인(送人)'에 나오는 '이별의 눈물 해마다 흘러 푸른 파도에 더해지네(別淚年年添綠波)'에서 따온 것으로 평양기생들의 매력과 애틋함을 유감없이 담아낸다.

"그녀가 낮잠을 막 깼을 때 옅은 달무리가 생겨 봄날 같아서 교태와 부드러움을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할 듯하다."(기생 진홍)

"손가락이 가는 파처럼 섬세하다. 몸은 옷을 견디지 못할 정도다. 담박하여 물욕이 없다. 화장품이나 사치품을 남들은 다투어 추구하지만 그녀만은 홀로 뒷짐 지고 있으며 남자들이 간혹 돈으로 유혹하지만 그때마다 완곡한 말로 물리치곤 했다."(기생 취란)

"가는 눈썹에 도톰한 뺨을 가지고 있고, 담담한 말씨에 은근한 미소가 일품이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기생 영주선)

기생들을 묘사한 한 구절 한 구절을 볼 때마다 숨이 멎을 듯 아름답다. 한재낙은 이런 외적인 아름다움 뿐 아니라 비범하고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로서 기생을 그려냈다.

차앵이란 기생의 인품에 대해서는 "대대로 음악 하는 기생 집안 소생으로서 성격이 침착하고 차분하여 기방의 경박한 자태가 없고, 집에 머물 때 입는 옷은 거칠고 먹는 음식은 박하지만, 남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은혜를 베풀어 옷을 벗어주고 음식을 양보하였는데 곤란해 하는 빛이라곤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고 칭송했다.

언젠가는 한 남자에 매일 처지임을 한탄하며 여성의 자유를 열망한 죽엽, 자신이 모은 재산을 가로챈 계모를 끝까지 두둔한 패옥, 준수한 남자는 아무리 가난해도 정을 줬지만 천박한 사내는 만금을 줘도 거부했던 나직, 빗길을 걷다 신에 구멍이 나 당황한 자신에게 가죽신발을 벗어주고 맨발로 걸어간 사내아이에게 감격한 초제….

녹파잡기에는 평양기방을 무대로 활약한 유명 예능인들에 대한 기록도 풍부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13첩의 그림이 전해지는 기생화가 죽향(죽엽의 동생), 관서지방 최고 '세션맨'들의 반주 아래 절창을 펼쳤던 패성춘 같은 명창기생은 물론이고 남자 풍류객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유명한 신위가 '연광정과 부벽루 앞의 푸른 물결이 사라져야만 그 명성이 끝날 것'이라고 극찬한 당대의 '싱어송라이터' 홍출주, 평양의 명기 예닐곱이 각기 마음에 맞는 애인을 뽑아서 잔치를 벌이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 나타난 유일한 남자였다는 안일개 그리고 그가 어느 기생집에 있느냐에 따라 기생의 몸값마저 달라졌던 일급집사 최염아 등이 그들이다.

녹파잡기를 쓴 한재낙은 연암 박지원의 영향을 받은 개성 부호의 아들. 개성 출신을 등용하지 않는 조선의 정책 때문에 의해 좌절된 출사(出仕)의 꿈을 음풍농월로 달랜 문장가였다. 이상적은 그에 대해 "고해(苦海)의 세상에 빠져 있으나 환락의 자리에서는 질탕하게 즐겼네. 문장은 봄날의 꽃과 같고 비평하기는 능숙한 솜씨"라고 평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