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참패를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는 집권 당 대표의 참담한 처지에 먼저 위로를 드리는 게 순서일 것 같군요. “정치를 시작한 뒤에 가장 힘든 시간 중 하나를 보내고 있다. 정치를 왜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근본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는 정 의장의 진정성도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 의장의 고뇌에는 울림이 없습니다.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도 부재(不在)합니다. “한나라당의 싹쓸이만은 막아 달라”는 호소가 그렇듯이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왜일까요?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신뢰의 상실, 그 밑바탕에 권력에 편입한 민주화운동세력 전반에 대한 환멸(幻滅)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망과 환멸은 다릅니다. 실망에는 기대의 끈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무능한 자들의 오만과 독선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환멸에는 미련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정 의장은 한나라당이 성(性) 추문과 공천 비리 등 악재에도 불구하고 당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마술 같다”고 했지요. ‘마술’의 비밀은 바로 환멸의 반대급부입니다.
정 의장은 5·31지방선거 직후 “열린우리당이 단단한 중심이 돼 반(反)한나라당 연합전선을 구축하겠다”고 했습니다. 지역당의 틀을 깨야 한다며 내쳤던 민주당과의 당 대(對) 당 통합, 고건 전 총리와의 협력을 주축으로 정계개편을 이뤄내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겠다는 것인데, 그거야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정치세력 간 문제이므로 내가 여기서 가타부타 끼어들 건 아니지요.
다만 민주평화세력 또는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라는 소리는 더는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면 할수록 대중의 환멸이 깊어진다는 걸 모른다면 정 의장은 아직도 위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단적으로 얘기해서 대통령을 탄핵에서 구해 준 70%의 국민 중 3분의 2가 집권당에 환멸을 느껴 등을 돌렸거늘, 정 의장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모두 반(反)민주평화개혁세력이 되는 셈이 아니겠소. 하물며 거기에 진보-보수의 딱지마저 붙이려 든다면, 그것은 환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오.
요즘 열린우리당 사람들도 인정하듯 노무현 정권이 가장 잘못한 것은 통합과 포용 대신 분열과 배제(排除)의 정치를 한 것이고, 거기에 정 의장의 책임도 가볍다고 할 수 없지요. 사리가 그러한데도 여전히 이분법의 논리를 고집해서야 열린우리당이 ‘단단한 중심’이 될 수도 없고, 정 의장이 그 중심이 되기도 불가(不可)할 것이오.
얼마 전 방한(訪韓)했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한국은 10∼20년 후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라는 의제를 꺼냈지요. 열린우리당이 이제라도 ‘단단한 중심’이 되려 한다면 이 같은 미래 담론을 내놓고 발전과 성장의 전략 및 비전을 제시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부자는 줄고 빈곤층은 늘어난 ‘3년 성적표’를 놓고 민주평화개혁연대 같은 철 지난 소리나 한대서야 어찌 ‘단단한 중심’이 되겠소. 과거사나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상징정치로 지지기반이 단단해지는 것도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이념 과잉(過剩)의 정치는 이미 낡은 버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알리고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정부가 강남 집값을 잡는다면서 시민단체까지 ‘홍위병’으로 끌어들이려는 등의 엉뚱한 작태에는 마땅히 브레이크를 걸어야지요. 그렇게 다수 국민이 원하는 상식의 정치, 미래의 희망을 갖게 하는 실용의 정치를 하나하나 실천해나간다면 ‘단단한 중심’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대나 협력은 그 뒤에나 할 얘기지요.
혹,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올해로 정치 입문 10년인 정 의장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빨랐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버’하지 마시오. “정치를 왜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겸허하고 정직하게 마주하기 바랍니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