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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대학]美 올린공대

입력 | 2006-05-29 03:00:00

올린공대는 기존 공과대의 모든 것을 뒤집는 데서 출발한다. 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습을 먼저 하고 나중에 이론을 배운다. 올린공대생들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기기의 작동 원리를 실습해 보고 있다. 사진 제공 마이클 말로니 씨

작고 아담한 올린공대의 전경. 그러나 올린공대의 강점은 바로 이 ‘작다’는 데 있다. 사진 제공 마이클 말로니 씨

사진 제공 마이클 말로니 씨


2002년 대학 진학을 앞두고 레이턴 이게(전기 및 컴퓨터공학 전공) 씨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당시 하버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도 합격통지서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 처음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던 ‘무명 공대’를 방문한 뒤 마음이 흔들렸다. 고민 끝에 그는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 학교를 선택했다.

올린공대(정식 명칭은 ‘프랭클린 W 올린 공대’). 최근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신흥 명문 공대다. 하버드와 MIT 합격통지서를 받고도 이곳을 선택한 학생이 많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대학이다.

올해 처음 배출하는 졸업생은 모두 75명. 이미 보잉, IBM 등 내로라하는 회사들이 졸업생을 미리 스카우트했다. 상당수는 스탠퍼드, MIT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이 매년 그해 학부를 갓 졸업한 학생을 대상으로 직장 경력을 쌓은 뒤 들어올 수 있도록 입학 시기를 2, 3년 연기해 주는 특별전형 합격자 20명 중 합격자 2명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비결’이 뭘까. 이런 의문을 품고 보스턴에서 멀지 않은 니덤에 있는 올린공대로 향했다. 학교에 가기 위해 기차역에서 택시를 탔을 때 택시운전사조차 학교를 잘 몰랐다.

매년 75명 안팎을 선발하는 이 학교의 전체 정원은 286명. 학교에 도착하자 아담하고 깨끗한 캠퍼스가 눈에 띄었다.

“우리 학교는 없는 게 많습니다. 우선 입학생 전원이 4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학비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수에게는 종신재직권(tenure)을 보장하지 않고, 전공만 있지 학과도 없습니다.”

이 학교 홍보국장인 조지프 헌터 씨의 말이다. 학비 면제에 따라 학생들이 받는 혜택은 4년에 걸쳐 13만 달러(약 1억2000만 원)에 이른다. 이는 이 학교를 세운 ‘프랭클린 W 올린 재단’이 4억6000만 달러라는 거액을 투자하면서 세운 전통이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부(富)를 축적한 프랭클린 올린이 세운 이 재단은 올린공대의 오늘을 있게 한 주인공이다. 올린재단은 수십 년간 대학 교육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 미국의 공대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아예 학부 중심의 공과대를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미국과학재단 등의 자문을 거쳐 내린 결론은 그동안 아무도 하지 않은 ‘혁명적인 공대 교육방식’을 과감히 도입해 기존의 공대에 충격을 주자는 것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커리큘럼의 변화였다. 기존 공대는 먼저 이론을 가르친 다음 적용 원리를 가르치지만 올린공대에선 신입생부터 프로젝트 중심의 공대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5월 졸업과 함께 스탠퍼드대 석사과정에 진학할 예정인 카트리나 브라젝(21·여·기계공학 전공) 씨는 “1학년 때 ‘물병로켓’을 제작하는 실습을 했어요. 물리와 수학 등을 이용해 작업을 하면서 이론이 현장에서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배웠어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올린공대에서는 1학년 때부터 바로 레이저와 기계를 작동해 제품을 설계하고 만들어 보는 일을 한다. 자동차 엔진을 제작하기도 하고 무선 감지기를 통해 우편함에 우편물이 도착했는지를 알려 주는 신제품을 직접 만들어 볼 정도로 현장 교육을 강조한다.

4학년이 되면 모든 학생은 4, 5명 단위로 팀을 이뤄 모토로라, 노텔 등 유수의 기업들과 함께 신제품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한다.

토머스 세실(21·전기 및 컴퓨터공학 전공) 씨는 “농기계 제작회사인 존 디어와 함께 원격으로 농기구를 작동하는 기술에 필요한 거리인식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올린공대의 가장 큰 장점은 ‘작다’는 점. 이게 씨는 “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교수들이 모든 학생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며 “언제든지 교수들을 만날 수 있고 학생들의 공부를 꼼꼼히 챙겨주는 것은 큰 대학에서는 누릴 수 없는 올린공대만의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교수진도 미국 최고 수준이다. 설립 초기에는 종신재직권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우수 인력이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교수 인력을 30명 뽑는 데 미국 전역에서 3000명이 지원했다. 하버드대, MIT에서 잘 나가던 교수들도 올린공대에 몰려왔다. 이는 교수들도 그만큼 새로운 공대 교육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대학 측의 설명.

학부 과정이지만 디자인과 소비자 중심 제품을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것도 이 학교의 특징이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을 개발해도 소비자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다. 소비자 친화적인 디자인을 공부하는 강의실이 별도로 있을 정도.

또 마치 경영대학원을 방불케 할 만큼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다. 올해 졸업하는 이게 씨도 요가용 좌석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했고, 졸업 후 홍콩으로 가서 본격 기업경영에 나설 예정이다.

물론 오늘의 올린공대가 있기까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덩컨 머독 입학처장은 “건물도 없고, 동문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미국 최고의 공과대학을 만든다고 했을 때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올해 졸업생 75명의 ‘성적표’는 올린공대의 실험이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수한 학생들의 지원도 급증하고 있다.

머독 처장은 “학교뿐만 아니라 교수, 학생 모두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역사를 만든다는 각오로 ‘거대한 실험’에 동참했다”며 “올린공대의 목표는 좋은 공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대 교육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올린공대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기업들에 이들이 어떤 공대 교육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있다.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니덤(매사추세츠)=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SAT 최고수준 고교졸업자들 몰려▼

미국 대학에서 ‘무서운 아이들’로 떠오른 올린공대는 학생들을 어떻게 뽑을까.

대학 설립정신이 ‘실험과 혁신’인 만큼 전형과정도 혁신적이고 실험적이다.

1차 전형은 다른 대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교졸업생들로부터 지원을 받은 뒤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SAT), 고교성적, 에세이 등을 보고 합격자를 걸러낸다. 1차 전형에서 800명 정도가 지원하는데 여기에서 190명 정도를 뽑는다.

올린공대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2차 전형이다. 학교는 1차 합격자를 학교가 주최하는 ‘후보자 위크엔드’에 초청한다. 1차 합격자들은 5명 단위로 팀을 이뤄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필요한 재료와 2시간 반의 시간을 똑같이 주고 뭔가를 만들어서 교수, 올린공대 선배, 직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도록 한다. 여기에서는 창의성, 팀워크, 혁신성, 학업에 대한 열정 등을 중점적으로 평가한다.

2차 전형과정에서는 또 미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던져주고 토론하도록 한다. 상대방의 말은 잘 경청하는지, 동료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지 등을 체크한다. ‘작은 대학’인 올린공대에서는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올린공대와 ‘DNA’가 일치하는 학생을 선발한다.

매년 입학생은 75명 안팎이지만 다른 대학에 복수 합격한 학생들이 올린공대를 포기할 가능성에 대비해 최종 합격자는 75명보다 많다. 전체 학생 절반가량의 SAT 점수가 1440∼1540점(만점 1600점)일 정도로 우수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미국 유명 공대에 많이 포진해 있는 아시아계 학생들은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학교 측은 “아시아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하버드대나 MIT 같은 ‘빅 네임’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학생이 43%나 되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니덤(매사추세츠)=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