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모스크바 중심가 트베르스카야(옛 고리키) 거리.
주말을 맞아 외출한 시민들은 생소한 냄새에 코를 감쌌다. 소란스러운 함성도 들려왔다.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터뜨린 것이다.
이날 거리로 나선 시위대는 성적 소수자(동성애자). 이들에 반대하는 시위대도 보였다. 동성애자들의 시위는 유럽 국가에서는 흔하지만 러시아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스크바 시당국은 동성애자의 행진과 집회를 불허했고 법원도 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와 권익 보호를 주장하려던 행사였으나 불법화된 것.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은 “러시아의 사회 정서상 게이와 레즈비언의 공개적인 행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불허 이유를 밝혔다.
당국의 불허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권단체 회원 등 200여 명은 이날 행사를 강행했다.
반대쪽에서는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동성애자 집회에 반대하는 시위도 열렸다. 양측이 충돌하려 하자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려 양측 시위대를 해산시킨 것이다.
최근 러시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나치주의자들도 이 혼란을 틈타 일을 벌였다.
‘스킨헤드’로 불리는 이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러시아 사회의 소수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스킨헤드 무리는 이날 동성애자 집회에 참석한 독일 녹색당 소속 폴커 베크 의원과 프랑스 관광객 1명을 폭행해 다치게 했다.
서방 인권단체들은 “동성애자 집회는 불허하면서도 스킨헤드 난동은 못 본 체했다”며 러시아 당국을 비난했다.
이날 모스크바 중심가와 외곽순환도로에서는 100여 명의 운전자가 차량 시위를 벌였다.
경광등과 사이렌을 울리며 시내를 질주하는 ‘특권차량’을 없애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러시아 고위 관리들은 시민들의 불편은 무시한 채 특권차량을 애용한다. 최근 알타이 주에서 시속 100km로 달리던 주지사의 승용차와 부딪친 일반 운전자가 구속되자 시민들이 분노해 시위를 벌인 것이다.
1990년대 초 옛 소련 체제를 무너뜨린 ‘시민의 힘’과 1990년대 중반 경제난에 항의하는 시위 이후 모스크바에서 시위 모습을 보기는 오랜만이다. 당시 시위대의 요구는 민주화 등 거창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동성애자의 권익과 일반 운전자 보호 등 삶에 직결된 것이 많다.
러시아가 권위주의체제로 돌아가고 있다는 서방측의 우려가 있다. 하지만 각자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