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 동아일보 자료 사진
《1시간여의 짧은 강연이었지만 송호근(사회학) 서울대 교수는 “충격적”이라고 말했고 박근갑(사학) 한림대 교수는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학계의 폐부를 찔렀다”고 했다. 2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림국제대학원대 제1관에서 펼쳐진 김윤식(70·국문학) 명지대 석좌교수의 특강에 대한 평가였다. 이날 특강은 한림과학원이 10년 사업으로 추진 중인 ‘한국 인문·사회과학 기본 개념의 역사·철학사전’ 집필의 방법론을 모색한 제1회 개념사 학술심포지엄에 이어 이뤄졌다. 이 작업은 1850∼1950년 100년간 한국에서 형성된 국가 민족 사회 개인 등의 50여 핵심 개념이 어떤 굴절과 변용을 거쳐 정립됐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 학계를 벌거벗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김 교수의 특강은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 후학들에게 거침없이 맨살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1968∼2001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김 교수는 ‘읽다’라는 말의 동의어라 불릴 정도로 방대한 독서량과 그에 필적할 저술 활동을 통해 국문학사의 재정립과 문학비평 활동에 매진해 왔다.
“1926년 세워진 경성제국대 법문학부의 조선어문학 전공생(1회)이었던 도남 조윤제(1904∼1976)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독창적 이론을 창시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향가에서 발견한 ‘반절성론(한국 시가·詩歌는 반으로 쪼개진다)’과 ‘전절소후절대론(그 절반의 앞은 짧고, 뒤는 길다)’은 고려가요와 시조에까지 적용할 수 있는 일반규칙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 도남이 국문학을 ‘국어(한글)로 표현된 문학’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쓴 국문학사에서 한문학 작품을 솎아 낸 것은 바로 일본의 식민사관과 처절한 투쟁을 펼친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상기시켰다. 식민사관과의 투쟁은 도남과 김 교수 자신의 세대에 절체절명의 과제였다는 것. 독백이 이어졌다. “나하고 죽은 김현이 함께 쓴 ‘한국문학사’는 실은 김용섭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쓴 겁니다.”
한국에서 근대의 씨앗이 자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김용섭(사학) 연세대 명예교수의 내재적 발전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의 기원을 18세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를 통해 ‘조선근대문학은 서구문학의 장르를 형식으로 하는 조선의 문학’이라는 임화(1908∼1953)의 규정을 극복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때문에 임화를 얼마나 미워했는데”라는 김 교수의 독백은 다시 “아,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고생해서 뒤집어 놓은 것을 다시 뒤집겠다니 안병직이가 정말 때려주고 싶을 만큼 미워 죽겠다”는 말로 이어졌다. 근대화가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으로 성취될 수 없었고 일제강점기에 배태됐다는 안병직(경제학) 서울대 명예교수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진솔한 반응이었다. 김 교수와 안 교수는 동년배로 김용구 한림과학원장과 셋이서 자주 어울리는 친구 사이다.
노학자의 포용력이 빛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안 교수에 대한 솔직한 발언에 폭소를 터뜨리던 청중은 이어진 얘기를 듣고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카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한 ‘진리는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때만 진리’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반증가능성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오. 우리 시대를 관통했던 진리가 진리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과 같은 반증가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김윤식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진리가 역사적 속견(俗見)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용인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역사의 종착역이 아닌 수많은 간이역 중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을 수용하겠다는 원숙한 고백이었다.
거기에는 당대적 시대 고민에 대한 존중을 결여한 우리 학계의 풍토에 대한 아쉬움도 담겨 있었다. 우리 한문학의 문학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를 국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도남의 고뇌를 김 교수가 읽어 내듯이, 내재적 발전론의 취약점을 짐작하면서도 이를 깊숙이 포옹할 수밖에 없었던 김 교수 세대 학자들의 지적 고뇌의 맥락을 우리가 읽어내고 있는가. 김 교수는 농반 진반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힘겹게 구축한 진리가 진리로 통용될 수 있었기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도 가능했던 거요. 이제 당신들의 차례요. (우리 세대의 진리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못해도 국민소득 3만7000달러 시대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