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규민 칼럼]후회만 하고 고치지 못한다면

입력 | 2006-05-30 03:05:00


선거 기간에는 으레 진기한 장면들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압권은 역시 막판 열린우리당 수뇌부의 ‘대국민 반성식’이었다. 바로 며칠 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무력으로 야당을 내쫓고 단독으로 법률안들을 통과시키던 씩씩한 정당이, 준엄하게 국민을 꾸짖고 비판세력을 몰아세우던 기세 높던 여당이 돌연 나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의외였다. 어쨌든 여당이 뒤늦게라도 잘못을 뉘우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당의 반성이 진심이라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어야 옳다. ‘우리의 과오에 대한 평가로 이번 선거에서 참패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할 테니 그 결과를 보고 다음 선거에서 심판해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성하니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날 여당은 반성을 화두로 꺼냈지만 곧바로 ‘한나라당이 지방권력을 싹쓸이하면 민주헌정 질서가 와해된다’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지방권력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막강한 중앙권력, 그리고 그 주변기관을 여당이 싹쓸이한 지금 헌정 질서가 무너졌는가. 집권 세력과 이렇게 저렇게 얽힌 사람들로 관변 요직들이 싹쓸이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외감을 느꼈는지 당신들은 아는가. 오죽하면 대통령과 관련 있는 특정 학교 출신들이 잘나간다고 해서(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시중에서 그 학교 이름을 ‘하버드 상고’로 부를까.

여당은 지방선거가 끝난 후 평화 민주 개혁세력의 대통합을 선언했지만 열린우리당은 집권 후 보여 준 언행 때문에 이 아름다운 단어들과 가장 멀리 있는 정당으로 여겨진다. 이 당이 그동안 토해 낸 거친 말들이나 국회 본회의장에서 보여 준 과격한 모습들이 국민의 눈에 과연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보였을까.

여당이 지도부의 주장대로 내일 선거에서 참패한다 하더라도 이번 선거를 통해 이처럼 스스로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다. 하산 길의 정권 임기를 고려할 때 지금 교훈을 얻는 것이 비록 ‘철들자 노망드는 격’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당이 민심을 받들어 변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집권당뿐 아니라 이 나라 정치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올바로 바뀌려면 원인부터 알아야 한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어쩌다 이 꼴이 됐는지 모르겠다”던 정동영 의장은 “언론과의 불화, 국민과의 불화”를 민심이반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또 압도적 지지를 받다가 ‘여론의 배신’에 괴로워하는 강금실 후보 역시 “(정권이) 계속 싸우고 비난하고 편 가르는 모습에서 국민이 실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분석은 나름대로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정작 핵심은 놓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정을 운영해 가는 방법과 수단뿐 아니라 그 목표에 대해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항해술이 미숙하고 운항 태도가 불량한 것도 문제지만 승객들이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집권세력이 대한민국호(號)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는 것 아니냐는 점이다. 소위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격렬해지고 계층간, 집단간의 적개심이 높아져 온 나라가 늘 뒤숭숭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5·16군사정변 후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 등 우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공약은 다소 우스꽝스러웠지만 안전하긴 한 것이었다. 거꾸로 지금 반미 반일이 국시처럼 되고 공산주의에 너그러운 분위기가 번지고 있는 상황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우리당은 지지율이 ‘침몰’하는 배경에 그런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승객들이 원하는 목적지와 ‘집권 선원’들이 가고 싶은 방향이 일치하지 않을 때 해법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선원들이 생각을 바꾸면 된다. 그렇지 않을 때 국민은 다른 선택을 할 것이고 당신들 역시 취향에 맞는 딴 배를 찾아 타륜을 잡을 수도 있다.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당내 갈등으로 집권세력의 건설적인 변화가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회개(悔改)해야 할 집권세력이 선거 후에도 후회만 하고 고치지 못한다면 앞으로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기간 보였던 것보다 더 냉엄한 모습으로 여당을 대할지도 모른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