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개최와 경상수지 흑자 등으로 우리나라의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하던 1988년부터 10여 년간 필자는 주택 관련 위원회나 세미나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도 다양한 견해가 대립했지만 이것 한 가지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정부는 서민들의 주거를 향상시키는 데 주력하고, 중상류층의 주거 문제는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다.
실제 주택정책도 모든 역량이 서민 주거 안정에 맞춰졌다. 거의 모든 금융과 세제 지원이 국민주택 규모(전용면적 25.7평) 이하에 집중되었고, 그중에서도 18평 이하는 더 큰 혜택이 주어졌다. 서민 주택정책은 새로 짓는 주택의 일정 비율을 소형으로 짓도록 의무화한 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정부는 공영 개발된 토지를 매각하면서 건설업자들에게 18평 이하의 주택을 35%, 25.7평 이하의 주택을 70% 지으라는 조건을 붙였다. 재개발이나 재건축 때도 비슷한 조건이 따랐다. 그러다 보니 작은 평형의 주택이 너무 많이 지어져 미분양분이 나오는데도, 큰 평형을 짓기 위해서는 작은 평형의 서민주택을 끼워서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용면적 25.7평 초과 주택도 30%는 허용되어 있으니, 그 정도면 부자용 주택도 충분히 공급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론 그렇지 않았다. 아무 데나 평수만 큰 집을 짓는다고 해서 부자용 주거지가 되지는 않는다. 말하기 거북하기는 하지만 비싸게 사고팔리는 주거지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다른 소득계층과 상당한 정도로 격리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자 주거지를 둘러보면 대개 그런 속성이 있다. 그런데 평형별 의무 비율은 모든 사업장이 다 지켜야 했기 때문에 웬만한 크기의 주택단지는 항상 큰 아파트와 작은 아파트가 뒤섞이게 되었다. 규모가 수백만 평인 경기 성남시 분당, 고양시 일산 등 대규모 신도시에서나 비로소 평형 배분 요건을 만족하면서도 어느 정도 격리된 고급 주거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나머지 소규모 택지개발지구에서는 고급주택지가 공급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수도권에서는 1990년대 초에 5개 신도시가 공급된 후 15년간 고급 주거지의 공급은 거의 ‘0’이었다고 봐도 된다. 새로 공급되는 모든 택지는 서민주택이 됐다. 반면 수요는 반대로 움직여 왔다. 즉 서민주택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고, 고급주택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다.
우리나라의 베스트셀러 자동차는 포니에서 프라이드로, 쏘나타에서 그랜저TG로 변화해 왔다. 이제 티코나 마티즈 같은 서민용 자동차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정도다.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이 점점 좋고 비싼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음식, 옷, 여행에 대한 수요가 그렇고, 공급되는 제품의 질도 함께 향상돼 왔다.
주택 수요도 예외일 리가 없다. 모든 국민이 20∼30년 전보다 훨씬 좋은 주택에 살고 싶어 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서민주택에 대한 수요는 줄고 고급주택에 대한 수요는 늘고 있지만, 주택정책은 여전히 서민주택 위주로 공급하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고급 주거지용으로 마련해 두었던 성남시 판교마저 결국 서민 주거지가 되어 버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민주택의 값은 떨어지는 반면, 기존 고급주택의 값은 뛰는 게 당연하다. 2004년 말을 기준으로 했을 때 강남 아파트 값은 1990년보다 평균 93% 오른 데 비해 서민주택이라 할 수 있는 연립주택의 서울 평균 가격은 오히려 5% 떨어졌다. 그 15년 동안 주택을 제외한 나머지 물가가 90% 올랐고, 도시근로자 소득은 240% 늘었음을 생각해 보면 서민주택 가격의 하락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공급과 수요의 움직임을 살핀다면 응당 있어야 할 일이 실현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은 본래 목표인 서민 주거 안정을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그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강남과 그 인근 집값이 뛰는 것은 지나치게 서민주택만 지어 대서 생긴 부작용이다. 이제는 부자용 주택이 지어지도록 아량을 베풀 때다. 그래야만 고급주택의 값이 떨어질 수 있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