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지방선거 결과에 답답해하기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을 위해 선거운동까지 해 줬는데도 참패했으니 실망이 클 것이다. 연초부터 체제언론의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남측 좌파세력의 단결을 촉구했고, 선거 직전에는 남측 대학생들에게 “민노당 찍으면 사표(死票)가 되니 열린우리당 찍으라”고 부추기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민심이 완전히 떠나 버린 노 정권과 계속 손잡고 갈 것인가, 아니면 새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그가 어떻게 마음먹을지 궁금하다. 내가 김 위원장이라면 실망감을 추스르면서 이렇게 하겠다.
첫째, 노 정권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것이다. 이처럼 북한 돕기에 다걸기(올인)하는 정권을 다시 만나기는 어렵다. 남은 임기 1년 9개월이 너무 짧아 아쉬울 정도다. 민족을 돕기 위해서라면 미국과의 동맹에 균열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 정권 아닌가.
둘째, 받을 것은 받되 부담이 될 만한 약속이나 합의는 피할 것이다. 이미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 정권과 중요한 거래를 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간의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야박스럽기는 해도 남쪽에 어떤 정권이 들어설지 모르는데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셋째, 그렇다고 속내를 드러내선 곤란하다. 적당한 수준의 교류 협력에는 계속 관심을 갖는 척해야 한다. 그래야 남측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매달린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회의가 안성맞춤이다. 생색도 내고 얻을 것도 많다.
억측이라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북에 더는 끌려 다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 정권 3년 동안의 대북관계를 보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북은 남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 본 적이 없다. 최근 무산된 경의·동해선 철도 시험운행이 단적인 예다. 합의까지 해놓고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렸다. 군부의 반대 때문이라지만 변명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금강산 관광의 전례를 응용해 더 큰 것을 얻어 내려는 속셈이다.
북은 1998년 현대 측과 금강산 관광에 합의하고서도 관문인 장전항(港)을 열지 않았다. 이곳이 북한 제1함대 기지여서 해군이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현대 측이 시범 항해를 위해 배를 타고 장전항에 들어서면 200여 문의 포(砲)가 일제히 배를 겨냥했다. 현대 측은 결국 포대 철거 비용을 주기로 하고 장전항을 열 수 있었다.
경의·동해선 시범운행 취소도 마찬가지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양보를 비롯해 더 큰 것을 내놓으라는 얘기다. 철도 주변 군(軍)기지 이전 비용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북이 정말 철도를 열 생각이었다면 경의선이나 동해선 중 한 곳은 시범운행을 허용했어야 옳다. 동해선만 해도 이미 육로로 하루 평균 1000여 명의 금강산 관광객이 오가는데 못 열 이유가 없다.
북을 상대하는 것은 이처럼 힘든 일이다. 줄 것 다 주면서도 아쉬운 소리 하는 쪽은 언제나 남이고, 받으면서도 큰소리치는 쪽은 북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북을 개방사회로 끌어내겠다는 생각이겠지만 지나쳐선 곤란하다. ‘선의(善意)’에는 ‘선의’로 답하도록 북을 설득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남북관계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문제는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대북 저자세가 더 심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미숙한 국정운영과 지지층 이탈로 위기에 몰린 정권일수록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5·31선거에서 참패한 이 정권이 딱 그런 처지다. 선거 직전 한명숙 국무총리가 “지금이 남북 정상회담 적기”라고 한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진부한 말이지만 외교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다. 사상 최악의 선거 패배에서 드러난 밑바닥 지지율로는 어떤 대북정책도 성공하기 어렵다. 무리하게 추진했다가는 부작용만 낳는다. 그 부담은 차기 정권, 그리고 국민이 진다. DJ 방북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대북정책으로 활로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김 위원장이 돼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기 바란다. 5·31 참패에 크게 실망했을 그가 이 정권의 진정한 파트너가 돼 줄까. 그러기엔 그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할 것이다.
노 정권은 개성공단을 비롯한 기존의 교류·협력사업만 잘 관리해서 다음 정권에 넘겨줘도 충분하다. 욕심을 버리는 것도 훌륭한 대북정책이다.
이재효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