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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대학]터키 빌켄트大

입력 | 2006-06-05 03:00:00

빌켄트대 컴퓨터센터 전경. 터키 최초의 사립대학인 빌켄트대는 이후 설립된 많은 사립대학의 모델로 인재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빌켄트대

빌켄트대 학생이 교내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앙카라 전역에 방송되는 ‘라디오빌켄트’는 대학생이 아닌 지역 주민도 많이 듣고 있다. 사진 제공 빌켄트대


터키 수도 앙카라 시내에서 10여 km 떨어진 외곽에 ‘빌켄트(Bilkent)’라는 마을이 있다. ‘Bilkent’는 터키어 ‘Bilim Kenti’의 약자로 ‘과학과 지식의 도시’를 뜻한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학구적인 이름이 무색하게 황량했던 마을에 생기를 불러일으킨 건 바로 빌켄트대다.

1984년 터키 최초의 사립대로 설립된 빌켄트대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고교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학이 됐다. 터키에서는 매년 170만여 명의 고교생들이 대학입학시험을 치르는데 상위 100명 중 30∼40명이 빌켄트대를 선택하고 있다.

빌켄트대는 관료적이면서도 규제가 많아 발전이 더딘 국립대와 차별을 두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50여 개에 이르는 터키의 사립대학들의 상당수가 빌켄트대를 모델로 삼고 있다.

147만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캠퍼스에 들어서자 ‘이곳이 과연 터키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터키어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영어만 들렸기 때문이다.

빌켄트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모두 영어시험을 봐야 한다. 토플 CBT 213점 이상을 획득하지 못하면 학교 안에 마련된 영어센터에서 집중적으로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 토플이나 센터에서 치른 영어시험 점수가 일정수준 이상이 돼야 비로소 정규수업을 들을 수 있다.

빌켄트대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다. 학생들의 과제나 시험도 모두 영어로 한다. 자연스레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끼리도 영어로 대화한다.

미국 코넬대와 컬럼비아대 교수를 지낸 알리 도그라마시 총장은 “전 세계의 따끈따끈한 논문을 실시간으로 봐야 효과가 있다”며 “빌켄트대 출신이라면 졸업 후 미국과 유럽의 유명 대학원에서 영어 고민 없이 공부하거나 외국계 기업에서 영어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빌켄트대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놀랄 정도다. 졸업생들의 미국 대학원 입학자격시험(GRE) 평균점수가 수리능력시험은 790점(800점 만점), 분석능력시험은 760점(800점 만점)이나 된다.

캠퍼스 내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이 대학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온 교수들도 제법 많다. 1000여 명의 교수진 중 3분의 1이 외국인이다.

유명 역사학자인 노먼 스톤 교수도 10년 넘게 재직했던 영국 옥스퍼드대를 떠나 1997년 빌켄트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빌켄트대는 비영어권 국가에 있으면서도 영어권 학자로서 안착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며 “역사는 짧지만 학생들의 수준이 높고, 학교에서도 교수들에게 연구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빌켄트대가 교수들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대학교수 평균 연봉 이상의 급여를 비롯해 사택, 교육비, 의료비, 식비까지 제공하고 있다. 빌켄트대 교수들은 입는 것을 뺀 모든 것을 학교로부터 제공받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이는 우수한 교수진이 좋은 학생을 불러오는 원동력이 된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빌켄트대는 자녀교육 때문에 터키로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외국인 교수를 잡기 위해 캠퍼스 안에 초중고교 과정의 국제학교도 만들었다. 이 학교의 수준은 선진국의 국제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국제학교 교사 대부분이 미국과 영국에서 학위를 받은 인재들이다.

에롤 알쿤 부총장은 “국제학교의 수업료는 비싼 편인데 빌켄트대 교수와 교직원, 대학원생 자녀에게는 수업료의 10∼30% 정도만 받는다”며 “단기 방문 교수들에게도 사택을 비롯해 정규직 교수들에게 주는 혜택을 모두 주고 있다”고 말했다.

1만740명의 학부생과 1013명의 대학원생도 파격적인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다. 학부생의 25%, 대학원생 100%가 전액장학금을 받고 있다. 대학원생에게는 장학금과 별도로 생활비 명목으로 일정액을 지급하며 사택도 제공한다.

빌켄트대의 설립자는 의사 출신으로 터키의 유명 기업인 테페 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이산 도그라마시 박사. 교수와 학생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진 설립자의 의지에서 나온다. 테페 그룹에서 빌켄트대에 내놓은 전입금만 지금까지 1조 원에 육박한다.

실업률이 높은 터키에서 졸업생의 취업률은 고교생이 대학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도그라마시 총장은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몇 권 찍지 않는 귀한 책이기 때문에 줄 수는 없고 이 자리에서 잠시 봐도 좋다”며 두꺼운 책 한 권을 건넸다. 책에는 그 해 졸업예정자 전원의 자기소개, 학점, 어디에 취업하고 싶은지와 지도교수의 코멘트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총장은 그 ‘귀한 책’을 들고 기업 관계자나 기관 등을 찾아다니며 졸업예정자들의 취업을 부탁하고, 추천서가 필요하면 직접 작성해 건네기도 한다. 그 결과 코카콜라, P&G 등 다국적 기업의 터키사무소 최고경영자(CEO), 외교부, 재경부 등의 부처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활동하는 졸업생들이 많다. 최근에는 동문이 터키 중앙은행 총재 자리까지 올랐다.

빌켄트대에 유학 중인 오종진(국제관계학 박사과정) 씨는 “빌켄트대의 경쟁력은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인재를 중시하는 학교 분위기”라며 “아직 세계적인 명문대는 아니지만 가능성과 비전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앙카라=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오픈 캠퍼스’ 도서관-식당 등 지역주민들에 개방▼

터키 국립대의 경우 대학 구성원임을 증명하는 카드가 없으면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기 힘들 정도로 경계가 삼엄하고 폐쇄적이다.

하지만 빌켄트대는 지역 주민과 더불어 성장하는 전략을 택했다. 누구든지 “도서관에 왔어요”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자유롭게 캠퍼스를 출입할 수 있다.

도서 구입비만 연간 30억 원을 쓰는 빌켄트대 중앙도서관은 터키 내에서는 가장 좋은 도서관으로 손꼽힌다. 도서관은 주말이면 책을 보러 오는 지역 주민들로 북적댄다. 연간 6만여 명의 지역 주민이 도서관을 이용한다.

주파수 96.6MHz의 ‘라디오빌켄트’는 교내 방송을 넘어서서 앙카라 전역에 방송된다. 클래식,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24시간 방송되기 때문에 청취하는 지역 주민이 많다.

캠퍼스 안에 설치된 노천극장과 콘서트홀도 앙카라 최고 시설이다. 대학과 관련된 행사 외에 지역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심지어 캠퍼스 구내 음식점은 인근 지역 주민에게 배달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케밥, 피자, 스파게티 등이 저렴하고 맛있어 구내 음식점을 이용하는 주민이 제법 많다.

빌켄트대의 이러한 전략은 대학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봄가을에 열리는 축제는 대학 축제인지 지역 잔치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주민들의 참여가 활발하다.

빌켄트대 대외협력처 관계자인 베르타 보르게 씨는 “정부에서 자율성을 부여받아 처음으로 설립된 사립대인 만큼 지역 주민을 위해 공익성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려는 게 학교 방침”이라고 말했다.

앙카라=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