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일제의 독도 강탈은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잊혀질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일본인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 역사학계가 하루빨리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야 합니다.” 일본 내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음을 보여 주는 문건(본보 5일자 A1·8면 보도)을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낸 최문형(71·역사학·사진) 한양대 명예교수는 5일 한국 근현대사 학계의 폐쇄성이 역사적 진실 규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너무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을미사변도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이라는 좁은 스펙트럼에 갇히기 일쑤입니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아무리 똑똑했다 한들 그들은 세계사의 흐름에 둔감한 졸(卒)에 불과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최 교수는 우리 국사학계가 민중사적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 연구에는 치중하지만 정작 우리 근대사의 방향을 결정했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너무도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의 이권 독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삼국간섭을 명성황후의 외교적 수완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을 당시 국제정세에 무지한 아전인수식 해석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했다.
“삼국간섭은 명성황후가 유도한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잔칫상에 숟가락을 놓으며 끼어든 것입니다.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로 돌아선 것은 그 이후입니다. 언뜻 그 판단이 절묘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치밀한 정보망을 통해 삼국간섭이 곧 와해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일본이 그 머리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교과서포럼 주최 학술대회에서 우리 국사학계의 편협한 역사관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는 최 교수는 “국권침탈기의 역사에선 우리가 어떤 국제적 상황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가르쳐야 하는데 한반도 안에서 벌어진 일만 보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진정한 교훈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념의 관점에서 접근하다 보면 가장 중요한 진실을 놓치게 됩니다.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 이바라키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양심으로 꼽히는 역사학자지만 일개 역사소설에 불과했던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씨의 책 ‘민비 암살’을 학문적 성과로 둔갑시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명성황후가 사용한 분가루의 냄새 등 시시콜콜한 것은 다 추적하면서 정작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 이 책에 대해 오에 교수가 ‘나는 쓰노다 씨의 팬이 됐다’는 평을 달아줬기 때문입니다.”
최 교수는 을미사변과 독도문제 그리고 한일강제병합의 이해를 위해서는 러-일전쟁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러-일전쟁은 1904년 발발돼 1905년에 끝난 전쟁, 동양이 서양을 물리친 전쟁이 아닙니다. 한반도의 관점에서 그것은 1895년 을미사변을 시발점으로 하고 1896년 아관파천을 전환점으로 하며, 전쟁 그 자체를 변곡점으로, 그리고 1905년 독도 강탈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귀결점으로 하는 일련의 흐름입니다. 오늘날 독도문제가 영토문제가 아니라 역사문제라는 점도 여기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최 교수가 러-일전쟁과 한국병합의 이런 상관관계를 다룬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병합’(2004년)은 정작 국내에서 1000부도 안 팔렸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5000부 이상 팔렸다. 일본이 진짜 무서운 이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