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나는 서울 미아리 삼양극장과 아폴로극장에서 온종일 소일했다. 낡은 스크린 속에서 리샤오룽(李小龍)의 이름을 패러디한 거룡이나 흑룡 같은 배우들이 펼친 무협의 경지는 아직도 내 기억의 지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절정의 고수일수록 적을 쉽게 제압했다. 저러다 자기 몸을 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악스럽게 칼과 봉을 휘둘러 대는 수십 명의 무리를 나의 거룡과 흑룡은 지그시 눈을 감는 듯싶더니 아주 간단한 손놀림으로 제압하였다. 추풍낙엽! 그때 고수의 동작은 참으로 단순하고 우아하였다.
어디 지난 시절 무협영화뿐이겠는가. 실제의 삶에서도 각 분야의 고수들은 단순 명쾌한 해법으로 미증유의 혼란에 빠진 상황을 타개해 버린다. 오리무중으로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상황을 한순간에 전환시켜 버리곤 했던 옛 ‘정치 9단’들이 그렇고, 모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한 단순한 디자인의 옷과 건축이 보여 주는 경이로운 단순성 또한 그렇다.
단순성! 이는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질러 버리는 거야’ 하는 무뢰한의 우악스러움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는 사태의 변화무쌍한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고루하게 단 하나의 방식을 관철하려는 것과는 다른 경지의 얘기다. 미로처럼 얽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되 그 낱낱의 변수에 일일이 얽매이지 않고 높은 차원에서 일거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급전시키는 것이 단순성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처럼 예기하지 못한 상황으로 끌려갈 때 직관적으로 그 멀미나는 상황을 통찰하는 고수의 시선이 필요하다. 본선에서는 그런 상황이 재연돼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나와의 평가전처럼 뜻한 바와 달리 잘 풀리지 않을 때 역부족의 상황을 쉽게 타개해 나가는 고수의 결정이 필요하다. 본선에서는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골문을 향하여 지나치게 복잡한 우회로를 찾아 헤맬 때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더라도 단 한 번에 해결하는 고수의 행동이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이을용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최근 몇 차례 평가전에서 보여 준 경기는 가히 ‘월드 클래스’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상대의 혈맥을 끊어 버렸고 순식간에 빈 공간으로 드리블을 하였으며 역동작에서도 반대편으로 질주하는 동료에게 패스를 하였다. 터키에서 살아 돌아온 일명 ‘을용타’라는 고수가 있어 암중모색의 불안한 정세를 헤쳐 나갈 것이니 우리가 지레 16강의 희망을 포기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을용밖에 없다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다. 고수가 대체로 연장자이기 쉬우니 우선 수비의 최진철과 공격의 안정환에게도 주문을 하거니와 일보 전진이 어려우면 이보 후퇴를 고려하고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쾌도난마로 관통해 버리는 고수의 진면목을 기대한다.
2002년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와의 전반전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폴란드의 체력에 밀려 중원의 주도권을 일시적으로 양보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짧은 패스도 자주 끊겼다. 그때 홍명보의 중거리 슛이 터졌다. 비록 아쉽게 골문을 벗어났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부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샅바를 다시 움켜쥐게 되었고 좌우 측면의 섬세한 돌파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황선홍의 첫 골이 터진 것이다. 그 놀라운 단순성! 한국축구대표팀의 고수들에게 당부한다.
정윤수 스포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