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타계한 차범석 선생은 대표작 ‘산불’ 등을 통해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전통을 완성했다. 아래 사진은 고인의 대표작 ‘산불’. 동아일보 자료 사진
6일 타계한 차범석 선생은 우리 시대 최고의 극작가이자 한국 연극계를 지켜온 산증인이었다.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 ‘희곡 작법의 교과서’로 꼽히는 고인의 대표작 ‘산불’은 1962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이진순 씨의 연출로 초연된 후 영화, TV 드라마, 오페라로도 선보였다.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를 발표한 이래 왕성한 창작을 멈추지 않은 고인은 팔순 때도 신작 ‘옥단어!’를 내놓는 등 6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고인은 “기록과 자료를 남기는 것도 연극운동이다”라는 소신을 실천해 200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 소극장 연극사’를 펴냈다.
연극평론가 유민영 씨는 “유치진이 시작한 사실주의 연극(희곡)이 차범석에 와서 완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며 “고인은 1963년 극단 ‘산하’를 창단하면서 일찌감치 연극의 대중화를 부르짖었고 연극은 물론 여성국극, 악극, 무용극 등의 대본을 쓰며 각 공연 예술 장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대(大)문화인이었다”고 회고했다.
“대중성을 요구하는 TV 드라마라도 사회성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 고인은 1980년 첫 회 ‘박수칠 때 떠나라’를 시작으로 드라마 ‘전원일기’를 1년간 집필하기도 했다.
고인은 연극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적극 참석해 예술계 원로로서 책임을 다했다. 5월 연극배우 김동원 씨가 타계했을 때도 장례위원장을 맡아 영결식에 부축을 받으며 참석했다가 넘어져 연극계 인사들을 안타깝게 했다. 고인의 막내아들 순규 씨는 “오래전 앓으셨던 위암이 5개월 전 재발해 치료를 받았는데 일주일 전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전했다.
고인의 대표작 ‘산불’은 창작 50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세계 무대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일본 공연이 추진되는 한편 세계적인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이 각색해 뮤지컬 ‘댄싱 섀도우’로 제작되고 있는 것. ‘산불’은 6·25전쟁 중 남자들이 다 전쟁터로 나가고 여자들만 남은 한 두메 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이다.
고인은 ‘산불’의 일본 공연을 위해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 대본을 직접 일어로 번역하며 애착을 보였다. ‘댄싱…’을 제작하는 박명성 신시뮤지컬 컴퍼니 대표는 “일주일 전 찾아뵈었을 때도 7월 3일 ‘댄싱…’ 오디션에는 ‘걸어서 못 가면 휠체어를 타고라도 가서 꼭 보겠다’고 하셨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좌우명이 ‘빚 없는 인생’이었을 만큼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 고인은 신용카드, 휴대전화, 자가용이 없는 ‘3무(無)원칙’으로 유명했다.
1998년 출간한 자서전 ‘떠도는 산하’에서 고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후회 없이 살았고, 외길 인생을 걸어왔고, 그래서 많은 사람의 은혜를 듬뿍 받았으니 그 이상 무엇을 부러워할 것인가. 쓰고 싶은 얘기를 썼고, 사랑하고, 술과 춤과 노래를 사랑했으니 그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비롯해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극작가협회 회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동아연극상 특별상, 이해랑 연극상, 동랑연극상, 금호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옥순(78) 씨와 아들 순주(일산 백병원 방사선과 의사) 순규(동남해운 대표이사), 딸 혜영 혜진, 사위 김윤석(동아제분 상무) 씨가 있다. 장지는 전남 목포 선산.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