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제시한 단어를 어김없이 쓰다가도, 맘에 들지 않으면 당장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다. 이의를 다는 데 머물지 않고 이 말은 어떠냐는 투로 대신할 대자 대안까지 곧잘 꺼내 보인다.’
머리의 하인인 듯싶지만 실제론 머리의 주인인 것? 소설가 최일남(74·사진) 씨의 손이다. 같은 단어를 또 쓰려고 하자 손이 멈춰 버린다. 작가의 손은 재탕 반복되는 단어 대신 새로운 것을 찾고 싶어 한다. ‘창작의 결벽성’을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 씨가 13년 만에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현대문학)를 펴냈다. 50여 년 소설을 써온 원로 작가의 예민한 성찰이 담긴 책이다.
산문의 대부분은 문학과 언어에 관한 이야기다. 1953년 등단했을 때부터 출판사 편집장을 하면서 활자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사에서 기자로 데스크로 일하면서 활자가 업이 됐을 때 등 문자와 함께한 그의 인생이 소개된다.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한 문장에서 진솔함이 느껴진다.
돋보이는 부분은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다. ‘얼핏 비슷한 말이라도 그때그때 정황에 따라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말 임자를 만나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작가의 지론. ‘표현의 틈을 저밀 수 있는 데까지 저며 제일 정확한 놈을 골라내는 작업을 거쳐야 진국이 된다’는 것이다. 외래어의 틈입과 남북 분단이 가져온 말의 이질화, 인터넷 채팅으로 인한 말의 훼손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돌아보고 각성하게 만드는 최일남 글의 힘은 여전하다.
최 씨는 “스러진 옛 기억의 단편들을 주워 모은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글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