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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권순택]공청회 막고 미국 날아온 反FTA시위대

입력 | 2006-06-08 03:00:00


“제국주의의 심장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저지하기 위해 모였다.”

한미 FTA 협상 개시 전날인 4일 오후 2시 반, 미국 워싱턴 시내 세계은행 앞 머로 공원. 한국의 원정 시위대가 미국의 반전 반세계화 단체 회원 등과 함께 1주일 동안 벌이는 ‘FTA 저지 투쟁’은 이런 선언과 함께 시작됐다.

이날 시위와 집회는 일부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꽤나 모범적으로 진행됐다. 시위대는 경찰과 사전 합의한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다양한 방식의 시위를 선보였다.

그날 이후 계속된 시위도 아직은 큰 불상사 없이 진행되고 있다. 5일 협상 장소인 미 무역대표부(USTR) 앞에서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의 차량을 가로막고 험한 말을 한 것과 협상장 밖에서 북과 꽹과리를 울려대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일부 시위 참가자의 막판 돌출행동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농민·노동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민중운동 세력은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과 지난해 12월 홍콩에서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반대 시위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자해와 폭력 때문에 충격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민중 세력의 지지를 받고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서 그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군과 경찰을 상대로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워싱턴 원정 시위는 그들도 평화적인 시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로 작심했는지 경찰과의 합의 사항을 최대한 지키고 있다. 그 이중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시위와 행사 내용들을 보면 주최 측이 치밀하게 준비하고 조직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본부, USTR 본부, 백악관 등 핵심 대상을 겨냥한 시위, 도로에 드러눕기와 촛불 시위, 삼보일배 같은 퍼포먼스, 기자회견, 워크숍, 외국 단체들과의 연대 등 구성도 다양하다.

워싱턴에서는 하루 평균 4건의 시위가 열린다. 시위에 피켓과 플래카드가 사용되지만 요란한 소리를 내고 악을 쓰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자신의 주장을 말 그대로 시위할 뿐이다.

원정 시위는 FTA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해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를 비롯한 일부 단체가 FTA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민중단체들처럼 격렬한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FTA 협상과 관련 있는 175개 업체와 관련 단체들이 ‘비즈니스연합’을 구성해 분야별 요구 사항을 수렴하고 개방 일정 등을 조직적으로 정부에 제시해 왔다.

다양한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물론 기본이다. 이처럼 미국 측 FTA 협상안은 이해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의견 수렴을 통해 마련된 것이다.

미 업계 대표들은 협상이 시작된 뒤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연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적극적인 홍보전을 펴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측 협상안은 FTA 반대 단체들의 저지로 공청회조차 열지 못한 채 마련된 것이다. 공청회는 무산시키고 미국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이 무슨 실익이 있을까.

한국 협상단 관계자는 “원정 시위는 협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FTA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위는 지지 세력을 결속하고 반대편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FTA 저지 시위를 기획하는 그 능력과 정성으로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권순택 워싱턴 특파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