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리서치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9%는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압승 이유로 ‘정부 여당의 실정(失政)에 따른 반사이익’을 꼽았다. ‘후보나 공약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답은 16%에 불과했다. 요컨대 국민은 ‘차악(次惡)’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안에선 선거 직후의 자숙(自肅) 기미는 벌써 사라지고 자만의 소리가 슬슬 흘러나오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선거 결과에 대해 “한나라당이 반사이익을 거둔 것이 아니라 잘한 결과”라는 진단을 내린 것도 그렇다. 대표비서실장이 그제 박근혜 대표 피습 경위를 밝힌 글에서 “의연하게 대처한 대표의 삶의 원동력은 오랜 고통의 단련에서 나오는 것” “당신 몸이면서도 몸이 아닌 삶을 살고 있다”는 등의 표현을 쓴 데 대해 당 일각에선 “불행한 일이었지만 지나친 미화(美化)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많은 국민은 미래에 대해 희망을 주지 못한 점에서 여권의 좌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나 한나라당발(發) 포퓰리즘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행정중심복합도시법, 과거사정리기본법, 신문법, 사립학교법 등 주요 법안 처리과정에서 오락가락하다가 뒷북치기에 바쁘지 않았는가. 선거 직전에는 공천 금품 수수 의혹으로 “역시 수구 부패집단”이란 비판을 듣기도 했다.
‘개혁적 보수’의 가치를 지키기는커녕 ‘수구꼴통’ 딱지가 붙을까봐 전전긍긍함으로써 자기정체성도 스스로 흔들었다. 국민이 이를 잘 아는데도 다시 자만·자족의 분위기가 인다면 “상황이 조금만 호전돼도 현실을 잊고 대세론에 빠지고 만다”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오죽하면 이 시장의 발언에 대해 “착각도 유분수”라는 반응이 당내에서 나올까.
2002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52% 득표로 승리했지만 대선에선 졌다. 이번에는 54%로 ‘싹쓸이’를 했다. 하지만 국민이 흔쾌히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의 청사진’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2002년의 악몽은 되풀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