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幻滅)의 뒷맛은 쓰다.
국민은 사실상 노무현 정권을 탄핵했다. 노 정권이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대통령제 덕분이다. 그러나 중앙권력은 좀처럼 자신들의 과오(過誤)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김병준 전 대통령정책실장은 “우리가 가는 길이 옳다. 확신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노 대통령의 생각도 그럴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여당이 사상 초유의 참패를 당한 직후 정책홍보토론회를 주재했다. 그리고 “한두 번 선거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이 아니다. 제도나 의식, 문화, 정치구조 등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여당에서조차 그게 말이 되느냐고 시끄러워지자 “여당이 선거에서 졌는데 언제 책임 안 진다고 했나”고 물러섰지만 발언의 무게가 전자(前者)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 정권의 독선과 오만에 환멸을 느낀 표심(票心)은 지자체와 지방의회를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수도권 전역을 거쳐 강원에 이르는 거대한 청색 벨트를 이뤄냈다. 유례없는 중앙권력-지방권력의 양극화 현상이다.
변하지 않는 중앙권력과 견제받지 않는 지방권력의 ‘나쁜 균형’이 굳어진다면 그 나쁜 영향은 결국 국민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환멸의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쁜 균형’을 깨는 일은 열린우리당부터 해야 한다.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당하고 지지율도 최악의 수준이라지만 열린우리당은 143석을 가진 원내 제1당이다. 국회가 대의(代議)민주주의를 하는 곳이라면 집권 여당이 지방선거에서 분출된 민의(民意)에 부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개혁파니 실용파니, 재야(在野)파니 친노(親盧)파니 하며 내부 다툼이나 하다가 다음 대권 향방을 살펴 제 살길이나 찾으려 들 거라면 차라리 당장 해체하는 것이 낫다.
민의에 따르려면 변하지 않는 중앙권력(대통령과 그의 사람들)과 맞설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의 탈당(脫黨)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안영근 의원의 말마따나 “(노 대통령이) 당에 있으나 없으나 크게 차이 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노 대통령에게 남은 카드는 없어 보인다. 억지로 만들려고 한들 민심이 이렇게 철저히 등을 돌린 마당에는 어림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역(逆)발상의 함정’에 매몰되어 있지 않느냐는 점이다.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민심과 그 시기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길게 봐야 한다”는 인식은 그에게는 자기 보존이자 위로의 밀어(蜜語)일 수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마저 ‘역사 놀음’을 할 수는 없다.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 지름길은 다수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념 타령, 개혁 타령은 그만하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이 하라는 일을 해야 한다. 야당 할 각오로 변하지 않는 중앙권력과 싸워야 한다. 중앙권력의 ‘홍위병’인 386 근본주의자들과도 선을 그어야 한다. 그렇게 국민의 곁으로 다가가야 살길이 열릴 것이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김근태 의원은 “당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독배(毒杯)를 마시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독배’는 어쩌면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의 의식이 지난날 재야 운동권의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면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어떤 독배를 마신다 한들 당을 살려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낡은 이념의 외투를 훌훌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국민의 삶, 나라의 미래와 대면해야 한다.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결단으로 변하지 않는 중앙권력에 맞서야 한다. 이제야말로 그가 말했듯이 ‘계급장을 떼고’ 싸워야 할 때다.
한나라당은 지방권력 장악이 독(毒)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자체와 지방의회의 결탁은 필연적으로 권력 남용과 부패를 불러올 위험성이 크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환멸의 반대급부’일 뿐이다. 지방 한두 곳에서라도 문제가 터지면 환멸의 화살은 곧바로 한나라당으로 향할 것이다. ‘나쁜 균형’을 깰 절반의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다. 1년 반의 승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