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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이민 1세대 김양희 박사가 보는 韓-佛수교 120주년

입력 | 2006-06-14 03:08:00

프랑스 루앙 주재 한국 명예영사로 활동하고 있는 재프랑스 한인 1세대 김양희 박사가 지난 50여 년간 한국의 위상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 박사는 6·25전쟁에 참전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53년째 살고 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1953년 2월, 청년 김양희는 인천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군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고국을 뒤로한 채. 그는 모파상과 플로베르를 좋아하는 불문학도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며 전장을 누비던 프랑스 장교의 유학 권유를 받아들였다. 40일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프랑스는 낯설디낯선 곳이었다. 당시 프랑스 내 한국인은 10명 남짓. 프랑스인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동남아 어디쯤 나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제 TV와 휴대전화는 프랑스에서 최상품으로 꼽힌다. 거리에는 한국산 자동차가 늘고 있다. 한국인은 근면 성실하고 똑똑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올해 양국 수교 120주년을 맞아 한국을 한 차원 더 높게 알리는 행사가 프랑스 곳곳을 수놓고 있다. 8일 열린 기념 공연 때는 프랑스 정부 행사 때도 잘 쓰지 않는 베르사유궁 내 오페라 극장을 한국 공연진에게 내줬다.

김양희(79) 박사는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한다. 프랑스 거주 한인 1세대인 김 박사는 한-프랑스 교류사의 산증인.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도시 루앙에서 김 박사를 만나 120주년을 맞는 감회를 들어봤다.

그는 불문학과 1학년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통역병으로 유엔군 산하 프랑스 대대에 들어갔다. 당시 국제 사회에 한국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1월 부산에 상륙한 프랑스 군인들은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습니다. 한국을 베트남 근처 나라로 알았다더군요.”

동상에 걸려 손발은 물론 목숨까지 잃는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김 박사도 직접 쇠톱을 들고 수술에 동참해야 했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 부업으로 근근이 생활하다 동료 학생들끼리 모이면 고국 걱정만 했다.

유학생들은 소르본대 앞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햇살이 따사롭고 테라스에는 빈자리가 있었지만 아무도 햇볕 쪽에 나앉지 않았다. 누가 뭐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가난한 한국인’이란 자격지심 때문에 눈에 띄는 곳에 나서지 못했다. 이들은 자동차를 바라보며 “한국에서 저런 차를 만들려면 150년쯤 지나야 할 것 같다”며 부러워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한국산 자동차는 파리 시내를 활주하고 있다. 김 박사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꿈같던 일”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과 한국민은 프랑스에서 ‘찬밥’ 신세였다.

1970년대 초반 한 교민이 파리에 최초의 한식당을 열려 하자 행정당국은 “제대로 세금을 낼 것인지 믿을 수 없다”며 불허했다고 한다. ‘독재 국가’라는 꼬리표도 늘 따라다녔다. 김 박사는 “프랑스 관료들이 한국 외교관을 잘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고 회고했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며 ‘독재국가 한국’이란 인식은 사라졌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은 한국을 일반인에게까지 알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국에 대한 좋은 인식을 프랑스인에게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이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으며 승승장구하자 프랑스인들은 한국 응원단에 박수를 보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인을 만나면 얼굴에 태극기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한국이 잘 알려졌다는 사실은 한식당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중산층과 젊은이들 사이에 요즘 한식당을 찾는 게 유행이라는 것.

김 박사는 “프랑스인 가운데 한국을 경제 분야에서 위험한 경쟁 상대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문화 분야도 선전하고 있다. 김 박사가 공동 소장으로 있는 루앙대 한국사회문화연구소에서는 프랑스 학생 130여 명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이 학생들이 한국 영화제를 열어 시민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김 박사는 1955년 유학 시절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던 한 살 연상의 폴 코팡 씨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코팡 씨는 당시 신장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던 김 박사를 보살펴 주다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것.

김 박사는 “처가 쪽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청년과 결혼한다며 아마도 싫어했겠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면서 “고국이 잘살아야 외국에 있는 우리도 어깨에 힘을 주고 살 수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루앙=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