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스타크의 ‘파리채’(1998년).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1999년 건축한 독일의 전차 정류장. 원뿔과 육면체, 노란색과 검은색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사진 제공 길벗
◇그레이트 디자이너 10/최경원 지음/368쪽·1만6000원·길벗
유럽에선 지나가는 아줌마도 알아본다는 이 시대 디자이너를 대표하는 아이콘, 필리프 스타크.
산처럼 튀어나온 배, 금방 자고 일어난 듯한 곱슬머리, 거구가 힘겨운 듯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이 ‘디자인 안 된’ 몸을 지닌 스타크의 디자인을 이끄는 힘은 유머다. 그의 디자인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스타크는 ‘물질’이 아니라 ‘꿈’을 지향한다. 다른 첨단 디자인들처럼 차가운 느낌이 없다. 유행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다. 날이 선 세련됨으로 사람을 긴장시키지도 않는다. “화려한 디자인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만큼 쉽게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스타크가 원한 것은 디자인의 영생(永生)이었다.
이 책은 20세기 디자인사를 써 내려간 거장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좇는다. 20세기 최고의 건축을 남기고 자살의 의혹 속에 사라져버린 르 코르뷔지에, 90세의 나이에도 싱싱한 감각의 디자인을 보여 주는 루이지 콜라니, 포스트모던 디자인을 선도했던 알레산드로 멘디니….
디자인은 예술인가? 아니면 대중적이어야 하는가? 저자는 디자이너들의 영원한 화두를 끄집어내며 “디자인의 가치는 그 실존적인 감동에 있다”고 강조한다. 디자인은 단지 산업의 부산물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땀과 헌신으로 이루어져 왔다며, 그 위대한 성취 이면에 가려진 들끓는 열정을 전한다. 코코 샤넬이야말로 그러한 삶을 살아갔다.
현대적인 세련미, 여성의 우아함, 도도한 귀족성…. 샤넬의 패션은 근 한 세기 동안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검은색은 샤넬의 상징이었다. 그는 검은색에 대한 상식에 역주행하면서 ‘샤넬스러운’ 패션의 문법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그는 시대를 디자인했으니 현대 의상의 기본 틀은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그런 그도 사랑 앞에선 한 여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나치 장교에게 마음을 뺏겨 스파이 활동에 가담했고,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로 도피한다. 그가 패션계에 복귀한 게 1954년. 71세 때였다.
그는 재기에 성공하지만 나이를 초월한 열정도 평생 그를 옥죄었던 외로움의 그늘을 걷을 수는 없었다.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그는 더욱 일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모르핀에 취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럭셔리는 천박함의 반대”라고 그는 말했던가. 샤넬의 명품, 그것은 디자이너의 인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