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소학교의 운동회는 마을 잔치였다. 한 소학교의 운동회에서 학생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교원이 심판을 보는 모습. 멀리 운동회에 몰려든 지역 주민들이 보인다. 사진 제공 서해문집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김태웅 지음/174쪽·5900원·서해문집
‘첫째, 학비 일체는 훈장이 부담, 월사금은 애초에 없고 대신 한 달에 술 한 병을 지참할 것. 둘째, 공책 연필 등은 무료로 급여. 셋째, 등교하면 매일 밤 왜떡(일본과자) 한 개씩 배급.’
국문학자 양주동이 11세 때인 1913년 자기 집 방 한 칸을 글방으로 바꿔 훈장이 되면서 내건 학생 모집요강이다.
1910년 강제합방 이후 일본은 보통학교 교육이 예비교육이 아니라 완성교육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초등교육 통제에 유달리 관심을 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상급학교 진학 대신 ‘근면 착실한 노동’을 곧장 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보통학교 교원들마저 환도를 차고 교단에 올라야 했던 시절, 애국적 지식인들은 서당에 눈을 돌렸다. 각지에 서당 설립 붐이 일어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전국 서당 수가 6540개에서 2만5486개로 늘어났다. 배움의 첫 단계는 초등교육이다. 교육학자인 저자는 중세 교육이 근대 교육으로 변모하는 조선 후기∼3·1운동 시기에 서당과 소학교에서 훈장과 교사들이 무엇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는지, 일본의 개입이 교육을 어떻게 달라지게 했는지 등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조선 후기 서당의 입학일은 대부분 동짓날이었다. 동지 이후 음이 쇠하고 양이 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당에서는 겨울엔 경서와 역서처럼 어려운 학과를 가르치고 여름엔 시나 율을 읽고 짓는 등 흥미가 높은 학습을 했다. 그때에도 ‘대(大),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5등급 평가제가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서당을 근대적 소학교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지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내정간섭으로 1895년 일본의 학제를 본뜬 소학교령이 반포됐다.
신식 소학교가 중점을 두어 가르친 것은 시간 개념이었다. 이전엔 해가 뜨면 학교에 오고 해가 지면 돌아가는 방식이었으나 학생들을 관리, 통제하기 위해 시간 개념이 강력하게 주입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본의 초등교육 통제에 맞서 민족교육이 어떻게 명맥을 유지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1906년 일본의 보통학교령 반포에 맞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전국 각지에 소학교와 서당을 열었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운동회를 자주 열었다. 1896∼1910년에 열린 운동회 중 94%인 204회가 1905년 이후에 열렸다. 결국 일본은 1910년 ‘교육의 본지에 어긋나는 무장시위’라며 운동회를 중단시키고 만다.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오던 민족교육의 힘은 3·1운동을 맞아 폭발했다. 당시 한 일본 간부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목격함으로써 장래 교육상 큰 화근을 남겼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의 걱정대로 많은 학생은 독립운동가로 성장했고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일본에 맞섰다. 배움의 힘은 컸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