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높은 소리와 산을 울리는 장단.’ 고즈넉한 한옥 마루에 서서 판소리 ‘수궁가’를 완창하는 정순임 명창의 목과 고수의 손끝에서 여유가 한껏 묻어난다. 사진 제공 악당이반
《판소리는 왜 ‘노래’나 ‘창(唱)’이 아니고 ‘소리’라고 할까? 판소리에서는 노래뿐 아니라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 만물의 다채로운 음향이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또 판소리는 씨름판, 놀이판처럼 함께 어우러지는 ‘판’에서 공연된다는 점에서 펄펄 살아 뛰는 현장의 음악이다》
19일 오후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고택 독락당(獨樂堂)에서는 툭 트인 자연 공간에서 판소리의 흥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완창 음반 녹음이 이뤄졌다. 국악방송과 국악전문음반사 ‘악당(樂堂)이반’이 공동 기획한 판소리 자연녹음 현장. 400여 년 전 지어진 고즈넉한 한옥 사랑채에 앉은 정순임(64) 명창은 완창 판소리 ‘수궁가’로 관객들을 초여름의 시원한 수궁으로 인도했다.
독락당은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 선생이 1516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 사방이 시원스레 뚫린 대청마루에는 나비가 날아다녔고, 흙돌담을 넘어온 바람은 뜰 앞 비자나무의 무성한 잎을 흔들어 대며 마치 비가 오는 듯한 시원한 소리를 냈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가 사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객들의 추임새가 중요합니다. 이번 음반에는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도 다 들어갑니다. 힘들더라도 추임새를 끝까지 열심히 넣어 주십시오.”
이날 녹음을 맡은 김영일 악당이반 대표는 마이크를 정 명창 앞에 한 대, 고수 앞에 한 대, 그리고 20여 명의 관객 앞에 두 대 설치했다. 현장 음을 최대한 잡아내겠다는 의지였다. 수궁가의 하이라이트는 육지에 간을 빼놓고 왔다는 토끼의 말에 용왕이 진노하는 대목. 중모리 장단에 맞춰 한껏 달아오른 명창의 목소리에 갑자기 담장 너머 동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자칫 녹음이 중단될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 관객들은 더욱 열심히 ‘얼쑤’ ‘좋다’ 하는 추임새로 외부의 소음을 덮어 버렸다.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 명창은 천재적인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장월중선(1925∼1998)의 큰딸. 고종의 어전 명창이었던 전설적인 소리꾼 장판개(1885∼1937)가 외종조부다. 정 명창은 송만갑-장판개-장월중선으로 맥이 이어져 온 장판개 바디(명창에 의해 다듬어진 판소리의 한 계보)의 수궁가를 이날 선보였다.
해질 녘이 되자 까치들의 지저귐은 더욱 커졌고, 저 멀리 산개구리들의 합창이 나지막이 깔렸다. 완창 판소리 ‘수궁가’는 원래 3시간 분량이지만 녹음은 5시간을 훌쩍 넘기고 오후 7시에야 끝났다. 비행기가 날아가고, 경운기와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녹음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 명창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면 조용하긴 하지만, 굴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어서 답답하고, 목도 잘 안 나왔는데 오늘 산천경계를 그리는 ‘수궁가’를 툭 트인 자연에서 지인(知人)들과 더불어 부르니 청도 좋아지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국악방송의 장수홍 PD는 “국악이 대중에게서 멀어진 것은 이렇게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즐기는 공간을 잃어버리고 박제화됐기 때문”이라며 “이런 자연음향 방식으로 녹음된 음반 시리즈를 통해 국악의 생명력과 감동을 되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녹음된 정 명창의 장판개 바디 ‘수궁가’는 24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2만 원. 02-2280-4115
경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