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로 예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무산된 것은 표면상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 등에 따른 국내외 정세의 급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무엇보다 북한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반기지 않는다는 기류가 읽힌다.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이 일시 연기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무기 연기 또는 완전 무산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사일 문제와 관련 있나=전문가들은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며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가는 상황에서 유화적 제스처로 보이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 교수는 “북측은 개인 김대중이 방북하느냐 마느냐로 미사일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모르겠지만 북한은 미사일 문제가 일단락되기 전에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에서도 미사일 문제가 불거지자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이 부담스러워진 측면이 없지 않다. 정부 당국자는 “상황이 지금 같지 않았다면 여러 경로로 북측에 성의 있는 답변을 종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어=김 전 대통령의 방북 문제 논의를 위한 일련의 남북접촉 과정을 보면 북한의 무성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초청자인 북한이 김 전 대통령의 방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특히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일찌감치 ‘개인 차원의 방북’이라고 선을 그어 북한에 줄 것도, 받아올 것도 없는 상황을 만든 것도 북측이 김 전 대통령의 방북에 흥미를 갖지 못하게 만든 한 원인으로 보인다.
정부 일각에서는 김 전 대통령을 초청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 스스로가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을 만날 경우 서울 답방 약속을 지키라는 강력한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에 대한 확답을 주기 어려운 김 위원장으로선 면담 자체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고(故) 김일성 주석의 애착으로 북한에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통하는, 판문점을 통한 열차 방북을 김 전 대통령 측이 지속적으로 추진한 것도 북측에 거부감을 줬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개인과 국가의 어젠다 혼동”=김 전 대통령은 14일 광주에서 열린 6·15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 기념사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면 우리 민족의 운명과 어떻게 하면 통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 나갈 것인가 등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자격의 방북을 강조하면서도 ‘민족의 운명’과 통일방안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김 전 대통령의 방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줄기차게 터져 나와 방북 추진 자체가 소모적인 국론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없지 않다.
정치권에서는 이처럼 여러 문제점과 논란에 휩싸인 데다 실현 가능성이 낮았는데도 김 전 대통령이 방북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은 과욕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비판도 제기된다.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추진은 개인적인 어젠다와 국가적인 어젠다를 혼동한 전형적인 경우”라며 “국가적인 현안이 될 수밖에 없는 통일 논의를 방북에서 다뤄 보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욕심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