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긋는데 2년… 서울시장 권한이 그 정도니…”
“학교 앞에 도로표지판 하나 설치하는 데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지난해 서울 강동구청은 학부모들의 요청에 따라 A초등학교 앞에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을 설치하기로 했다. 도로 포장과 안전 울타리 설치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돼 보름도 채 안 걸렸다. 그러나 정작 스쿨존임을 알리는 간단한 표지판을 세우는 데는 3개월이나 걸렸다. 표지판 설치 권한을 갖고 있는 경찰로서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
서울시가 세종로 사거리에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데도 2년 넘게 걸렸다. 협의 대상인 다른 부처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서울시 관계자들은 그동안 “서울시장이 도로에 줄(횡단보도) 하나 긋는 권한도 없다”고 여러 차례 어려움을 호소했다. 심지어 서울시 직원들은 “야당 출신 시장이 있는 서울시가 뭐가 예쁘다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느냐”고 중앙부처 직원들이 비아냥대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자치정부’가 아닌 단순한 ‘단체’로 간주해 권한 이양을 꺼리고 있다.
한국공공자치연구원 이기헌 상무는 “지방자치가 12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지자체는 여전히 돈, 권한, 전문가가 없는 ‘3무(無) 지자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들은 스스로를 ‘2할 자치’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국세는 80%에 이르지만 지방세는 20%에 그치고 권한도 그에 비례한다는 얘기다. 다음 달 1일 출범하는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4기에서는 그만큼 개선의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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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옥’ 지방 식약청-중기청 등 업무이관 흐지부지
“나 참, 어제도 단속을 받았다니까요.”
대전의 한 학교 단체급식업체는 식중독이 자주 발생하는 여름철이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홍역’을 치른다.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구청 위생과, 교육청에서 따로 단속을 나와 이런저런 자료를 내놓으라고 한다. 한창 바쁜 시간에 1∼2시간씩 땀흘려 가며 설명도 해야 한다.
지방중소기업청, 지방식약청, 지방노동청, 지방국토관리청 등 이른바 특별지방행정기관은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인력과 예산을 사용하지만 업무는 지방자치단체가 하는 일과 거의 대부분이 겹친다.
노무현 정부의 ‘지방자치 분권 로드맵’에 따르면 지난해 이미 이들의 업무가 지방으로 이양됐어야 한다. 하지만 해당 중앙 부처의 강력한 반대로 지금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전혀 없다.
대통령 자문기관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1차 정비대상으로 정한 특별지방행정기관 사무소는 2003년 말 기준 155개, 소속 공무원은 7325명에 이른다.
특별지방행정기관의 가장 큰 문제는 지지체와의 기능 중복이다. 지방식약청의 경우 25개 주요 업무 중 18개가 지자체와 겹친다.
업무 중복은 지자체의 책임감과 의욕을 떨어뜨린다. 지방식약청의 보조 기관으로 전락한 많은 일선 시군이 주민 생활에 필수인 위생과와 환경과, 보건행정과를 환경위생과나 보건위생과로 통폐합했다.
민원 처리를 ‘원스톱(One-stop)’으로 한번에 처리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민원인이 지자체와 특별지방행정기관을 오가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금창호 박사는 “지자체와 특별지방행정기관이 서로 책임을 미루다 행정 및 단속의 사각지대가 생기기도 한다”며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하려면 지자체로의 업무 이전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지방세 비중 20%로 美日절반… 182곳 인건비 모자라
LG필립스LCD공장 건설과 가동을 계기로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경기 파주시. 매년 인구가 9% 가까이 늘고 있다.
파주에서 경기 고양시 일산으로 통하는 통일로는 출퇴근 시간이면 상습 정체의 ‘짜증 길’로 변한다. 우회도로가 필요하지만 파주시는 2.6km 닦는 데 무려 196억 원이 들어간다는 계산서만 뽑아 놓고 있다. 주민 수가 현재 28만 명의 갑절인 6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2010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박재홍 파주시 기획재정국장은 “현재와 같은 지방세 수입으로는 도로 건설을 엄두도 낼 수 없다”며 “문제는 앞으로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경기 과천시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 사정도 파주시보다 나을 게 없다.
전체 세금에서 차지하는 지방세 비중은 2005년 기준으로 선진국의 절반 수준인 20.5%다. 일본 40.3%, 미국 39.6%, 독일 49.3% 등이다. 자체 지방세나 세외 수입으로 인건비도 못 주는 지자체가 전국의 250개 광역시도 및 시군구 가운데 72.8%인 182개나 된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인 자치교육, 자치경찰제는 가물에 콩 나듯 논의만 가끔 될 뿐 도입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에서는 지자체의 자구 노력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자치단체’. 지난해 기준 재정자립도가 89.9%다. 하지만 강남구는 1995년 2041명이던 구청 직원을 올해 1월 기준 1307명으로 줄였다. 가로청소, 청사 시설관리, 구립도서관 운영 등 99개 업무를 민간에 위탁했다.
강남구청은 인건비를 10년간 761억 원 줄였고 효율도 높여 ‘2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국의 지자체 거의 대부분이 강남구보다 재정 상태가 훨씬 더 열악하지만 정원보다 공무원 수를 적게 운용하는 지자체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고양시 공무원 2000명중 박사1명… 정책개발 한계
지난해 경남 창녕군은 치매·중풍 노인을 위한 요양시설이 준공된 뒤에도 5개월 동안이나 문을 열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들여올 수입 의료기기에 대한 서류 작성 때문이었다. 미리 받아본 설명서가 온통 영어로 돼 있어 이를 해석할 공무원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외부 전문통역 기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해결해 조달청에 수입을 요청할 수 있었다.
경북 경산시 공무원 1070여 명 가운데 박사 출신은 고작 2명. 그중 한 명은 동사무소에서 전공과 관련 없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경산시에는 고시 출신도 없고 유학을 다녀온 공무원도 없다. 직원 재교육은 매년 한 번씩 사무관(5급) 승진자 한 명을 행정자치부 연수원에, 6급 공무원 서너 명을 도공무원교육원에 보내는 것이 전부다.
경산시 인사 담당자는 “대학 13개가 밀집한 경산시는 대학도시, 대구의 배후도시 등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지만 정책 개발을 할 수 있는 인재 육성 전략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경기 고양시 관계자도 “2000여 명의 시 공무원 중에 박사학위를 가진 공무원은 1명뿐”이라면서 “그러나 전문적인 분야는 외부 용역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말했다. 반면 주민들의 학력 수준은 상당수가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다.
한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는 지자체도 적지 않다.
충남 금산군은 다기능 문화관을 지어 놓았지만 이를 운영할 전문 인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구유니버시아드 문화행사기획단 기획위원과 대학로문화축제 기획위원을 지낸 김현준(43) 씨를 팀장으로 영입했다.
금산군은 유라시안 필하모니 교향악단(2006년 3월),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2005년 12월), 우크라이나 오데사 소년소녀합창단(2004년 11월) 공연 등 세계적 수준의 공연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유치해 다른 지자체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육동일(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충남대 교수는 “중앙집권적 경향이 강한 프랑스도 지방정부에 입법, 재정, 행정권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지방세 세원을 늘려 주는 추세”라며 “한국도 소비세를 지방세로 전환하고 지자체에 관광세 등 새로운 세원을 발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병희 차장 bbhe424@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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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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