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끝났다. 그래, 우리가 졌다. 흔쾌하게 졌다. 이기면 좋겠지만 져도 좋다! 질수 있으니까 게임이다. 억울하지도 미진하지도 않다. 잘 싸웠다 태극전사들! 우리도 잘 했지만 스위스가 우리보다 한수 위였음을 인정한다. 물론 부심이 오프사이드 깃발을 들어올린 걸 보고 이운재 키퍼가 안심하고 앞으로 나왔다가 한점 잃게 됐다고 애석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진 게 결코 아니란 걸 우린 이미 안다.
오늘 새벽 나 역시 광화문에 있었다. 잠? 잠 같은 건 이미 문제도 아니었다. 붉은 셔츠에 붉은 뿔에 태극기 치마를 입은 아이들은 제자리에 잠깐 잠깐 누워서 토끼잠들을 잤다. 자다말고 하늘로 껑충 뛰어오르고 신나게 꼭지점 댄스들을 춰댔다. 언제 태극기로 저렇게 깜찍한 미니 스커트를 만들었나. 언제 태극기가 저렇게 감각적인 케미솔이 되었나. 우리 역사 그 어느 때 태극기가 저렇게 유쾌하고 신명나는 상징물이 된 적 있나. 억울한 주검을 덮는 용도로 더 자주 사용되던 저 비장한 깃발, 그게 저렇게 귀엽고 패셔너블한 무늬인 줄 월드컵 아니었으면 모를 뻔했다. 뺨에 부벼박은 문신들은 다들 어찌 저토록 사랑스러운가!!
나또한 2천원을 주고 붉은 불이 켜지는 치우천왕의 뿔을 샀다. 그 뿔은 확실히 사람을 공중으로 휙휙 띄워 올리는 마력을 부렸다. 머리위에서 불이 번쩍거리는 전설 속의 왕, 일단 그걸 달고 나니 아이들과 함께 펄쩍펄쩍 공중으로 치솟는 짓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치솟음이 우리 팀의 승리만을 위함일까. 아니다. 그냥 넘쳐나는 생명의 용솟음이었다 물론 당연히 우리 팀이 이기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질 것을 전혀 예상치 않은 것도 아니었다. 진작부터 도박사들은 우리 팀이 질 확률을 65%로 잡질 않았나. 져도 좋았다. 실망도 했겠지만 마음 깊은 낙담일리야 없었다. 축구는 축구일 뿐인 것이다.
이천수가 여러 번 공을 놓쳐도 아무도 그를 야유하지 않았다. 박지성이 웬일인지 별 활약을 못해도 다들 박지성만을 소리 높여 연호했다. 예전의 우린 절대 저러지 않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누구누구 꺼져라!!고 외쳐대곤 했다. 마지막 우리가 스위스에 2대 0으로 진 게 확정된 그 순간, 16강의 꿈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그 순간 붉은 악마들은 어젯밤 전체를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 최고로 소리 높여 을 외쳐댔다. 슬슬 누선 관리가 잘 안되기 시작하는 나, 얼른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져서가 아니었다. 져도 대~한민국이라는 저 아이들을 좀 보아란 말이다.
엊저녁 내가 부른 노래는 모두 예전에는 서럽던 노래들이었다. 그걸 아이들은 신명나게 바꿔 불렀다. 다함께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소리높여 합창하던 ! 그 정한과 슬픔을 비벼놓은 가사가 그렇게 신명을 돋구는 응원가로 변했다는 것은 이제 민족정기가 바뀌었다는 증명이다. 내 젊은 날엔 조소와 저항을 가득 담아 가사를 바꿔 불렀던 !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를 우린 아무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늘엔 지랄탄이 떠있고 강물에 똥 덩어리 떠있고_로 고쳐 불렀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는 당연히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였다.
그렇게 비비꼬면서 가슴속 울분을 풀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2006년 우리 아이들은, 내 아들과 딸들은, 진정 글자 그대로 넘치는 격정을 담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라고 소리친다. 아아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진심으로 그렇게 외쳤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렇게 수십만이 동시에 입을 모아 내 조국, 내 나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이상의 환희가 또 어디 있으랴.
나 같은 구세대는(아, 내가 어느새 스스로를 이렇게 말할 시절에 당도해 버렸나) 뒷전에서 그 바뀐 분위기에 감동해 어쩔 수없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에 비하면 까짓 월드컵 16강 따위야 제 3한강교의 거대한 다리에 비한 좀벌레의 솜털에 지나지 않는다.
전진하라, 대한민국! 승리하라 대한민국! 영원하리 우리조국! 승리의 나래 펴고 대한민국, 날아올라 대한민국! 하늘높이 우리 조국, 세상의 중심으로~~우리 청년들이 월드컵 16강에 탈락하고 목 놓아 저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우린 게임에서 졌지만 과정에서 승리했다. 이건 얍삽한 수사가 결코 아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해가 훤히 떠오른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실망했냐고? 기운이 빠졌냐고? 아니다. 한숨 자고나면 다시 기운 팽배할 것이다. 우린 대~한민국이고 다같이 밤새워 그걸 함께 연호했다. 언제든 이렇게 뭉칠 수 있는데 실망은 무슨 실망! 아쉽다면 다만 다시 모일 날짜가 4년 뒤로 미뤄진다는 것, 오직 그것 뿐이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