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황중환 기자
《이준경(40·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씨는 최근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8)가 생리를 시작하자 속이 탄다. 아직 제 앞가림도 못하는데 뒤처리는 제대로 할지, 학교에서 자칫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것.
어려서부터 먹성이 좋았던 김경환(7·서울 구로구 오류동) 군의 키는 또래에 비해 한 뼘은 크다. 올해 들어 여드름이 하나 둘 생겼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소파에 누워서 ‘이상한’ 짓을 하는 일이 잦아져 병원을 찾았고 결국 ‘성조숙증’으로 진단이 나왔다.
‘우리 아이가 벌써?’
나이보다 웃자라는 아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실제 나이와 정신연령은 아직 어린이인데 몸만 어른이 된 것. 일찍 생리를 시작하는 딸을 위해 천 생리대를 마련해 주는 엄마들이 늘면서 관련 인터넷쇼핑몰도 하나 둘 생겨날 정도다.》
세브란스어린이병원에 따르면 2차 성징이 빠른 성조숙증 어린이가 2001년 72명에서 2005년엔 201명으로 급증했다. 또 성조숙증 정도는 아니지만 사춘기가 이른 ‘조발성사춘기’는 이보다 2, 3배 더 많다는 설명이다.
▽성조숙증과 조발성사춘기란=성인으로 가는 길목인 사춘기가 빨리 찾아오는 병이다.
여자 아이는 만 7세 6개월∼8세에 젖가슴이 부풀거나 10세 이전에 생리를 시작한다. 남자 아이는 10세 이전에 고환의 세로 길이가 2.5cm 이상, 용적이 4mL를 넘는다. 성조숙증은 여아가 남아보다 3배 정도 더 많다.
성별에 따라 성조숙증이 생기는 주요 원인도 다르다.
여아는 특별한 원인이 없는 특발성이 90∼95%. 간혹 뇌종양, 난소 물혹 등으로 생긴다.
하지만 남아는 고환 내 종양, 부신피질호르몬 분비 장애, 뇌종양 등이 전체의 60%. 특발성은 40%다. 따라서 남아가 성조숙증으로 의심될 때는 서둘러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게 좋다.
학계에서는 특발성의 원인을 환경 탓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연구에 따르면 최근 80년 동안 한국 여성의 초경 연령은 2년 정도 빨라졌으며 서울 지역 여아의 초경 연령은 농촌에 비해 평균 5개월 더 늦다.
인제대 의대 상계백병원 소아과 박미정 교수는 “특발성으로 성조숙증이나 조발성사춘기가 느는 것은 영양 상태가 좋아진 탓이 가장 크다”며 “체지방에서 만들어지는 호르몬인 렙틴이 뇌에 사춘기 시작을 알린다”고 말했다.
실제 여아의 경우 체중이 40kg 정도일 때 생리를 시작하는데 같은 연령이라도 마른 경우 2차 성징이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식품에 든 성장촉진 호르몬이나 성장 보조제,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사료에 첨가하는 여성호르몬 등도 성조숙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의심된다.
세브란스어린이병원 김덕희 원장은 “TV 인터넷 등을 통해 음란물을 보는 것도 아이들을 성적으로 조숙하게 만든다”며 “아이들이 일찍 성인물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장판 빨리 닫혀 키 더 안 자라=특별한 원인이 없는 성조숙증의 가장 큰 문제는 키다. 성조숙증인 아이들은 별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성인이 됐을 때 키가 여아는 150cm, 남아는 160cm 안팎에 머물게 된다.
성조숙증인 아이들은 어릴 때는 또래보다 키가 훨씬 크지만 일찍 사춘기가 찾아오고 이로 인해 뼈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많아지면서 성장판이 일찍 닫힌다. 즉 성장이 일찍 멈춰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여아는 첫 생리 후 1년 이내에 성장판이 닫히며 그동안 5∼7cm 자라고 더 자라지 않는다.
또 남들보다 신체가 빨리 발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영장이나 목욕탕 등에서 옷을 잘 벗으려고 하지 않는 등 정서적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치료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병원에서는 아이의 뼈 나이, 호르몬 수치 등을 통해 성조숙증 여부와 원인이 무엇인지를 진단한다.
특발성인 일부 아이는 뇌에서는 사춘기 발현 신호 없이 일시적으로 고환 및 난소에서 성호르몬을 분비하는 ‘가성 사춘기 현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사춘기 증상이 6개월 이내에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뇌에서도 사춘기 발현 신호가 있는 ‘진성 사춘기 현상’이라면 성호르몬 분비를 억제하는 호르몬을 4주에 한 번 맞는 치료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뼈 나이가 실제 나이와 같아지거나 만 13, 14세경이면 치료를 멈춘다.
성호르몬 치료는 전문의와 상의해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인제대 의대 소아과 박 교수는 “성조숙증을 늦추는 것이 자녀의 최종 키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정밀검사를 통해 전문의가 결정해야 한다”며 “성호르몬은 키를 크게 할 뿐 아니라 뼈도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에 부모가 섣부르게 성호르몬 분비를 억제하려 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