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모 구의회 김모 의원은 1대 의회인 1991년부터 내리 당선된 4선 의원이다. 김 의원은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또 당선돼 다음 달부터 5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김 의원의 15년간 구정(區政) 활동을 보면 최다선 의원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김 의원이 4대 의회(2002∼2006년)에서 질의를 한 건수는 0건. 김 의원이 발의한 조례도 단 3건으로 1년에 한 건도 안 된다. 그나마 이것도 동료 의원에게 묻어서 공동 발의한 것이다. 그 대신 김 의원은 선거를 위한 득표 활동은 열심히 했다. 결혼식 장례식 등 직접 챙기는 각종 경조사만도 한 달에 20여 건. 또 조기축구회, 새마을운동협의회,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등 지역단체 행사에도 부지런히 얼굴을 내민다. 김 의원은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지방의원의 권한과 역할이 너무 적었다”면서 “의정 활동으로만 제대로 평가받기에는 한계가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 조례안 발의 의원 12% 그쳐
본보가 4대 의회 기간 서울시 25개 구의회를 대상으로 조례안 발의 및 처리 실적, 의원 질의 건수 등을 전수 조사한 결과, ‘부실 의회’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서울시 각 구의회가 4년간 발의한 조례는 모두 2999건. 이 가운데 의회가 발의한 조례는 360건으로 전체의 12%에 불과했다. 1개 구의회가 4년간 14건, 1년에 3.5건의 조례안을 내놓은 셈이다. 나머지 88%는 구청장이 발의했다. 이는 16대 국회의원의 법률안 발의 가운데 의원 발의안 비중인 76.2%와 대조적이다.
서울시 25개 구 의원이 모두 460명인 것을 감안하면 구의원 1명당 발의 건수는 4년에 0.78건으로 1년에 평균 0.19건이다. 산술적으로 따져볼 때 임기 동안 조례안을 한 건도 발의하지 않은 ‘백수 의회’인 셈이다.
또 상정된 조례안을 처리한 실적을 보더라도 그동안 지방의회에 붙어 온 ‘거수기 의회’ 별명이 사실임이 드러나고 있다.
서울시 25개 구의회가 4년간 통과시킨 조례는 2943건. 이 중 81.8%인 2408건이 원안(原案) 통과다. 구청장을 제대로 견제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지방의회가 얼마나 활동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 중 하나는 의원의 질의 건수. 얼마나 단체장에게 따지고, 견제하고, 주민의 의견을 반영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다. 이 점수를 봐도 역시 여태까지 지방의회는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질의자료조차 집계되지 않은 동대문구의회와 성동구의회를 제외한 서울 23개 구의회의 전체 회의 질의 건수는 의원 1인당 4년간 14건, 1년에 3.5건꼴이다. 특히 임기 중 질의를 단 한번도 하지 않은 의원이 38명(8%)이나 됐다.
다른 지방의회도 서울시 구의회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
3대(1998∼2002년) 전국 지방의회 조례처리 실적에 따르면 250개 기초 및 광역의회가 발의한 조례 4만8186건 가운데 단체장이 아닌 의회가 발의한 것은 4518건으로 전체의 9.3%에 그쳤다.
○ 의원들 “우리도 할 말은 있다“
그동안 지방의회의 의정 활동이 저조한 데에는 의원 활동을 뒷받침할 만한 시스템 미비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전남 해남군의 한 군의원은 “여력이 있는 의원들이나 개인 경비로 사무실을 내고 있다”면서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보따리장수’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일해야 한다”고 전했다.
일부 광역의회(시도) 의원은 개인 사무실이 있지만 기초의회(시군구)의원은 대부분 의원회관의 공용 사무실을 나눠서 쓴다.
지난해 말부터 인턴 보좌관제를 실시한 서울시의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방의회 의원들은 보좌 인력이 없다. 국회의원이 보좌관·비서관을 두는 것과 비교된다.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있는 의회 사무국도 문제다.
경남 창원시 한 시의원은 “지자체 감사를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의회 사무국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시장에게 감사 내용을 미리 귀띔해 주는 바람에 엉망이 됐다”고 털어놨다. 충북 보은군의 한 군의원도 “의회 사무국을 통해 자료를 요청했더니 의회 사무국이 군청의 눈치를 보더라”고 말했다.
○ 보좌관제-전문위원 확대 필요
7월부터 출범하는 5대 지방의회에서는 의원 유급제 등 새로운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변화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다.
지방의회발전연구원 임경호 소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학력 수준이 향상되고 전문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됐다”면서 “의원 유급제가 실시되는 만큼 의원들도 책임감 있는 의정 활동을 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기초·광역의원 2888명 가운데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자는 1190명으로 전체의 66%를 차지하는 등 자질이 높아졌다. 또 직업정치인이 577명(19.9%) 진입했다.
임승빈(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지방자치위원장) 명지대 교수는 “지방의회가 정치색에서 벗어나고 주민 생활 밀착적인 기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의원 보좌관제, 전문위원 확대 등 정책보좌기능 강화를 위한 과감한 지원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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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 “사무국 인사권도 없는데…” 푸념▼
한국의 지방의회 권한은 지방자치의 뿌리가 깊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훨씬 미미하다.
지방의회 수준이나 의원 자질로 봐서 폭넓은 권한을 주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많다. 그러나 의회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권한마저 없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방의회 사무국 운용체계.
지방의회 사무국의 주요 기능은 기초의원들의 의정활동 보좌와 업무지원이다.
하지만 16개 시도와 234개 시군구 지방의회가 일반 평직원에서 사무국장까지 자신들의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의회로부터 견제를 받아야 할 지방자치단체장이 의회 사무국에 대한 인사권을 모두 쥐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국회 사무처 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국회의장이 아닌 대통령이 모두 쥐고 있는 것과 같은 이상한 모습이다.
서울시의회의 한 의원은 “사무국 직원을 서울시의회 의장의 추천에 의해 서울시장이 임명한다고 되어 있지만 말 그대로 형식뿐이고 서울시장이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주도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지방행정연구원의 황아란 수석연구원은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는 기본적으로 상호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해 운영돼야 하는데 사무국 운영을 볼 때 한국에서는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들 직원에 대한 인사권조차 갖지 못한 지방의회가 지방정부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갖고 지방정부의 예산과 행정업무를 충분히 견제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이처럼 지방의회 사무국 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지방정부가 장악하는 경우는 각 주(州) 정부가 각각의 주 헌법과 주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미국과 독일은 물론이고 한국처럼 중앙집권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반병희 차장 bbhe424@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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