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의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월드컵의 함성은 뜨거웠다. 한 경기의 극적인 승리는 다음 승리에의 기대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갈등도 분열도 다 잊고 모두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6월은 감동의 달이었다. 그러나 축제의 환희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것이 있었다. 56년 전의 6월 25일과 4년 전의 6월 29일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에게 6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우리 민족사의 비극 6·25전쟁을 일으킨 집단은 2002년 6월 29일 또다시 서해에서 우리 젊은이들을 공격해 스물네 명의 사상자를 내고야 말았다. 이틀 뒤 맞게 될 서해교전 4주년,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모윤숙의 시 구절을 떠올려 본다.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내 조국을 위해 영광스리 숨지었노니/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던/부디 일러 다오/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에서)
군인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나. 국가의 이념과 정체가 확실하고 지킬 가치가 있을 때 군인은 목숨 걸고 나라에 충성한다. 그리고 군 통수권자의 판단이 조국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아래 그에게 명운을 맡기고 명령을 따른다. 따라서 군 통수권자는 최대한 옳은 판단을 내릴 의무가 있다. 또 자기 군인의 희생에 대해서는 제 자식의 경우처럼 애통해 하고 분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서해교전 바로 다음 날 당시 군 통수권자는 해군 전사자들이 안치된 영안실을 외면하고 월드컵 폐막식을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우리 젊은이들의 희생이 더욱 원통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광주에서 열린 이른바 ‘6·15민족대축전’만 해도 그렇다. 불법단체가 주관한 이 행사에 우리 정부는 아까운 세금 14억 원을 지원했고 통일부 장관은 제1야당을 협박하던 북쪽 대표를 반갑게 영접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해 세계가 긴장하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민족공조’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다. 미사일 위협에 미국과 일본이 강력 대처를 선언하는데도 정부는 북한을 역성들고 싶어 하는 눈치다. 이런 어수선한 조국을 위해 우리 국군은 지금도 목숨 걸고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6·25가 해방전쟁이고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주장하는 대학 교수, 그리고 그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지켜 주느라’ 국가의 정체성에 흠집을 낸 법무장관, 그런 분위기에 고무돼 맥아더 장군 동상까지 철거하려고 날뛰는 사람들, 반미 반일 감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정부 책임자, 정책 실패에 분노한 국민이 마침내 지방선거를 통해 정권에 ‘레드카드’를 보냈지만 ‘국민이 이해 못 해도 내가 옳으면 간다’는 식의 오만을 못 고치는 집권세력, 이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군은 오늘도 바다에서 하늘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병이 비좁은 침상에서 칼잠을 자고 충분한 의료설비가 없어 민간에 치료를 의존하는 터에 남북 경협 명목으로 물색없이 북쪽에 퍼 주는 정부, 3년 반 동안 개혁한다며 뒤집어 놓은 결과 경제가 더 팍팍해져 제대하는 많은 장병이 곧바로 거리의 청년실업자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나라, 그래도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철책선에서 밤을 새우고 있다.
“희생된 분들에게 우리가 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의는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사악한 집단 위에 우뚝 서는 것이다.” 아프간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 유가족을 위로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다짐에 조국을 향한 이 나라 군인들의 충성심은 불타오른다. 군인 한 명의 목숨을 보석처럼 여기고 군인이 희생될 때 국민 모두가 유가족이라고 여기는 나라의 병사들은 용맹스러워지고 국방은 튼튼해진다.
이제 우리도 국군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 지키고 싶어 하는 그런 나라를 갖고 싶다. 6·29서해교전에서 산화한 6명의 영웅과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해군 장병,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 모두에게 국민이 존경과 사랑,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