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금융 중심가인 시티 지역. 이곳에는 미국 뉴욕 월가에 비교될 정도로 세계적인 투자은행들의 간판이 즐비하다. 시티 지역에서 금융맨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런던=이완배 기자
“여윳돈 생기면 펀드 투자… 습관이에요”
중세 유럽, 대대로 풍요로운 생활을 해 온 귀족들의 방에는 금과 은, 진귀한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돈이 넘쳐나자 전문적으로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1세기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용병국가로 이름을 떨치며 돈을 끌어 모았던 스위스, 귀족 계급의 풍요로움이 남달랐던 영국 등에서 부유층의 자산 관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자본주의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유럽에서는 이미 ‘자산 관리’라는 개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금융이 강해진 비결은 무엇일까.
발달한 선진 금융기법, 뛰어난 실력파 인재들, 세계에서 모여드는 자금 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지 전문가들은 제1의 원동력으로 ‘투자 문화’를 꼽았다. 수백 년을 이어 온 습관, 살아가면서 투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투자 문화가 바로 금융 강국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 투자는 습관이다
“남는 돈을 모두 투자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냥 돈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펀드 같은 곳에 집어넣는 거지요.”
삼성증권 런던 현지법인 박인홍 팀장은 영국인의 투자 문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영국의 수도 런던은 부동산 가격이 비싼 대표적인 도시다. 또 집을 마련하겠다는 시민의 의지도 강한 편이다.
그런데 영국인이 자금을 마련하는 방식은 한국과 다르다. 영국인은 집 장만을 위한 종자돈을 대부분 간접투자로 마련한다.
자동차 또는 대형 가전제품을 사거나 매년 한 번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습관적으로 투자 상품에 돈을 넣었다가 돈 쓸 곳이 있으면 빼 쓴다. 한국인이 은행 예금을 이용하듯 투자 상품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잘 짜인 금융 인프라는 이런 일상적인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주택가마다 있는 사설 투자자문회사는 저렴한 수수료로 고객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짜 준다. 이 때문에 영국인은 자산을 어떻게 나눠 투자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자문회사에 맡기면 전문가들이 알아서 투자 목적에 맞게 자산을 배분해 준다.
○ 투자자와 금융회사의 신뢰
유럽 사람들이 이처럼 투자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바탕에는 투자자와 금융회사 간 오랜 신뢰가 있다.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는 금융 선진국과 그렇지 못한 나라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스위스 금융그룹 UBS의 도나트 파자롤라 핵심고객 담당 이사는 “UBS의 최대 강점은 고객과의 신뢰”라고 했다.
UBS 개인고객의 평균 거래기간은 무려 40년. 대를 이어 UBS와 거래하는 고객도 수두룩하다.
고객이 자산을 맡기고 운용과 관리까지 일임하는 계좌 비중이 전체 고객의 40%나 된다. 게다가 이 비중은 매년 높아지는 추세다.
스위스에서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로도 못할 이야기를 자산관리 전문가에게는 털어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미국 메릴린치 존 올슨 자산관리상담사그룹 수석부사장은 “3대째 메릴린치에 자산 관리를 맡기는 고객이 적지 않다”며 “가족 모두가 참여해 자산에 관한 모든 것을 의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1672년 설립된 영국의 대표적 프라이빗뱅킹(PB)회사 ‘시 호아 앤드 코퍼레이션’ 고객 중에는 대를 이어 300년 가까이 거래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금융 현실은 이렇지 않다. ‘귀한 내 돈을 어떻게 금융회사에 모두 맡기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돈을 맡기더라도 한 금융회사가 아니라 이곳저곳에 나눠 맡긴다. 또 자신의 재산 명세를 금융회사에 공개하는 일도 드물다.
UBS 애너벨 브라이드 자산관리 담당 이사는 “개인 재산 명세를 솔직히 공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산관리가 어렵다”며 “고객과 금융회사가 서로 신뢰해야 진정한 자산관리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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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취리히=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