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친하게 지내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이으라(聯美國).’ 1880년 8월 동북아의 격동 속에서 조선이 생존을 고민하고 있을 때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이 부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통해 권고한 내용이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에 대외적인 균세(均勢)와 대내적인 자강(自强)을 권고했던 6000자의 이 글은 고종의 마음을 쇄국에서 개화로 돌려놓았다. 조선은 2년 뒤인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朝美)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고 국교를 수립한다.
▷하지만 ‘연미’는 잘되지 않았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1885년 ‘중립론’에서 “미국은 통상 상대로 친할 뿐,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 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협정으로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묵인했다. 한국 속 반미(反美) 감정의 역사적 연원(淵源)을 굳이 따진다면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이 확실한 우방으로 돌아온 것은 광복 후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왔고, 6·25전쟁 때는 연인원 178만9000명을 파병해 전사 및 사망 3만6940명, 부상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의 희생을 치렀다. 피로써 맺어진 한미동맹은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훨씬 낙후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미국에 대해 반미 찬미(贊美) 숭미(崇美) 혐미(嫌美) 연미 용미(用美) 항미(抗美) 폄미(貶美) 8가지 인식이 공존한다”고 줄리아 스웨이그 미 외교협회(CFR) 이사가 ‘프렌들리 파이어(오발·誤發)’란 저서에서 지적했다. 전환기의 한미관계를 보는 한국인의 복잡한 시각을 비교적 잘 짚어 냈다. ‘자주’를 외치다가 임기 중반이 넘어서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고 나선 이 정권 사람들은 어디에 속할까. 반미에서 용미로 전환한 것일까, 여전히 혐미, 항미인데 무늬만 용미일까.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