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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48년 코민포름, 유고공산당 축출

입력 | 2006-06-28 03:08:00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횡포도 싫지만 스탈린과 소련의 만행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 옛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생전에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총명함, 엥겔스의 열정, 레닌의 논리적 사고를 두루 갖췄다는 ‘유고의 아버지’ 티토. 그는 소련의 영도력 아래 국제공산주의의 단일노선을 추구한 스탈린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티토는 소련보다 먼저 주변 국가들과 독자적 외교관계를 구축하려 했고, 그리스 공산혁명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그가 정적을 소련의 간첩행위 혐의로 체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틀어졌다.

“유고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을 중상모략하는 악의적 정책을 펴고 있다. …정직하게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형제국가의 비판을 적대시하고 있다.”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은 소련 측의 이 같은 고발을 승인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유고 공산당을 축출했다.

코민포름은 1947년 소련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 프랑스 이탈리아의 9개국 공산당을 회원으로 창설된 기구. 서방의 마셜 플랜과 트루먼 독트린에 대항하는 선전활동 기구였지만 사실상 소련의 통제 기구였다.

본부는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뒀다. 티토가 열렬한 코민포름 지지자이던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동유럽 국가와 달리 독자적인 파르티잔 운동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유고를 견제하려는 스탈린의 포석이기도 했다.

유고 축출 이후 코민포름 본부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로 옮겨졌고, 스탈린은 유고의 민족공산주의 노선을 티토주의(Titoism)로 몰아 티토주의자 숙청 작업에 나섰다.

코민포름에서 쫓겨난 뒤 유고는 경제적 고립은 물론 군사적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티토는 자주관리와 비동맹 정책으로 독자적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특히 ‘1개 연방, 2개 문자, 3개 종교, 4개 언어, 5개 민족, 6개 공화국’의 유고를 하나로 규합해 냈다.

소련의 반(反)유고 정책은 1953년 스탈린 사망과 함께 막을 내린다. 1955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은 베오그라드를 방문해 양국 관계를 회복하고, 1956년 코민포름은 해체된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