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거 우리 헛산 것 아니오?”
작가 조정래(63·사진) 씨의 새 장편소설 ‘인간 연습’(실천문학사) 첫 장(章)에 나오는 장기수 출신 노인 박동건의 절망적인 외침이다. 여기에 작가의 고민도 담겨 있지 않을까.
‘인간 연습’은 조 씨가 역사소설 ‘한강’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장편이다. 그는 ‘한강’을 발표한 뒤 더는 역사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뒤 ‘사회주의의 붕괴와 20세기’라는 테마를 잡고 중단편 소설들을 발표해 왔으며 ‘인간 연습’도 이 맥을 잇는다.
소설은 수십 년 옥살이 끝에 강제 전향을 하고 출소한 노인 윤혁이 박동건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장기수 출신인 박동건도 윤혁처럼 강제 전향을 했다. 박동건은 그러나 ‘사상의 조국’ 소련이 “미국과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저절로 폭삭 주저앉아 버리고”, “태산같이 믿었던 북한마저 인민들이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알고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강제 전향을 했지만 마음으로 이념을 굳게 지켜왔는데 한순간 ‘헛산’ 꼴이 된 것이다.
조 씨는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무엇인가를 모색하고, 시도하고, 더러 성공하고, 많이 실패하는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존재이며, 그 반복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 아닐까 싶다”면서 “‘큰 연습’, 한 가지에 대해 오래 생각해 오다가 이 작품을 엮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큰 연습’이란 물론 과거의 이념이다. 역사소설 ‘태백산맥’으로 이적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조정래 씨는 새 소설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이 변질되면서 몰락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작가는 소설에서 운동권 출신 강민규의 목소리를 통해 사회주의 몰락 원인을 하나하나 진단한다.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몰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려고 만든 이데올로기를 비인간적으로 운용해 왔으므로 그 체제가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동안 “비인간적인 얼굴, 다시 말해서 짐승을 다루는 듯한 야만적인 사회주의 지배를 해 왔다”는 대목도 나온다. 나아가 “건전한 보수와 생산적 진보를 조화시켜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는”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게 나아갈 방향이라고 밝힌다.
평생을 바쳐온 이상이 자취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회오에 사로잡힌 개인을 통해 작가는 ‘이념형 인간의 종말’(평론가 황광수)을 고한다. 허망함과 패배감에 시달리던 윤혁이 새로운 삶의 의지를 얻는 것은 ‘인간의 꽃’이라는 아이들을 통해서다.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치던 어린 남매를 만난 뒤 그들을 돌봐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조 씨 소설 중 흔치 않은 해피엔딩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