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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단체장 4기, 아직 부실한 뿌리]정당공천제 ‘족쇄’

입력 | 2006-06-29 03:00:00


21일 오후 6시경 서울 성북구의 삼청각. 민선 지방자치 3기 임기를 거의 끝낸 서울시 구청장 21명이 저녁 식사 모임을 가졌다. 5·31지방선거에서 재신임을 받은 구청장이 13명, 낙선한 구청장은 8명이었다. 한나라당 소속이 20명, 민주당 소속이 1명이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자고 모였지만 이번 선거에 대한 감회, 특히 정당공천제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리 없었다.

○ “공천받는 비결이 더 궁금”

서울시구청장협의회 유영(강서구청장)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선거에서 이긴 분들 축하합니다. 그런데 선거운동 전략보다 공천 잘 받는 노하우가 정말 궁금합니다.”

유 회장은 한나라당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피식피식 터져 나왔다. 각자 상황은 달랐지만 모두 공감한다는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명박 서울시장도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공천받은 곳도 있어서 놀랐다”고 거들었다.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나서 낙선한 다른 구청장들도 선거 결과를 ‘당 공천을 못 받았기 때문’으로 받아들였다. 선거가 ‘임기 중 실적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듯했다.

○ 국회의원 ‘공천 족쇄’에 묶여

화제는 자연스레 공천 시스템으로 옮아갔다.

공천심사에서 안정권에 들어 무난하게 당선된 A 구청장조차 “중앙당에 가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 창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 무슨 요구는 그렇게 많은지…”라며 말을 흐렸다.

당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야 하고 매월 특별당비 30만 원을 낸다. 지역구 의원에 대한 섭섭지 않은 액수의 후원회비는 사실상 ‘의무사항’이다.

선거 직전에 은밀히 건네는 ‘공천 대가’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이번 선거에서 영남 지역의 단체장 경선에 참가했던 한 후보는 “공천헌금액이 기초단체장은 10억 원 이상, 기초의원은 1억 원대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면서 “지역구 국회의원 보좌관이 ‘작업’을 많이 한다”고 본보 취재진에게 밝힌 적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방자치단체장과 현역 국회의원 사이에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상조 경남 밀양시장은 최근 열린 경남시장군수협의회에서 ‘국회의원 횡포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 시장은 지역구 국회의원의 이름을 들면서 “공천을 앞두고 경선에서 중립을 지켜줄 것과 현 시의회 의장을 기초의원에 공천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하나도 안 들어줬다”며 “한나라당에는 미안하지만 (선거기간에 내가 한나라당 후보를 도와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된 사실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 지역 주민보다 중앙당 눈치 봐

공천에 입김이 센 국회의원과 주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지자체장이 의원 쪽으로 기우는 부작용도 속출한다. 지방자치에 중앙당이 개입하는 정당공천제의 폐해가 주민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B 구청장은 2003년 음식물쓰레기처리장을 설치하려고 했다. 구에서 발생하는 음식물쓰레기를 경기도에 보내 처리하는 비용이 연간 30억 원에 이르고, 갈수록 처리비용이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처리장이 들어설 동네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이른바 님비(NIMBY) 현상이었다.

B 구청장은 전체 구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라고 생각하고 밀어붙여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음 총선에서의 표심을 염두에 둔 지역구 국회의원이 반대하자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사업을 위해 따놓았던 환경부 예산 20억 원도 반환했다.

선거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신경을 써서 ‘내신 점수’를 잘 받아둬야 한다.

서울시 의원 허모 씨는 올 2월 소속 당 지역구 이모 의원 보좌관의 전화를 받았다.

“의원님이 내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정부 질문을 할 예정이니 반드시 참석해 주시고 힘차게 박수를 보내 달라. 다른 시의원들도 함께 소집했고 의원께 참석 여부를 보고할 예정이니 눈도장이라도 찍는 게 좋을 것이다.”

허 씨는 “지역구 주민과의 모임을 연기하고 국회의사당에 가보니 시의원은 물론이고, 구의원 9명과 구의원 출마 희망자로 거론되던 사람들도 여럿 와 있어 깜짝 놀랐다”면서 “지역구 의원 행사를 제쳐두고 지역구 주민 모임에 참석할 간 큰 지방 의원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 여야 의원 42명 “폐지해야”

지난해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제를 확대하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에 참여한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은 “중앙은 물론 지방까지 책임정치를 구현하고 인재 발굴 및 훈련을 통해 지방자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정당공천제의 취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주용학 수석전문위원은 “정당공천제로 중앙당의 입김이 시군구 의회까지 뻗쳐 지방자치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면서 “지방분권이란 세계적 추세에 ‘역주행’하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명지대 행정학과 임승빈 교수는 28일 열린 ‘5·31지방선거에 나타난 선거법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토론회에서 “정당이 아닌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가 되려면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을 정당이 공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이번 선거는 진정한 의미의 지방선거가 아닌 중앙선거의 대리전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열린우리당 이시종 의원,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 등 42명은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을 정당이 공천하지 않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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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경우▼

정치 선진국에서는 기초단체장과 의원의 정당 공천을 직간접적 방식으로 막는 경우가 많다. 지방정치가 중앙에 종속되는 부작용을 차단하고 지역 주민의 관심사를 더 많이 반영하기 위해서다.

‘지방자치의 산실’로 불리는 미국은 정당의 지방자치 관여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2001년 기준으로 미국 내 30개 주요 도시 중 77%가 지방선거에서의 정당 공천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정당 관여를 배제하는 것은 건국 이래 ‘엽관제도(선거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공직을 나눠 주는 제도)’의 폐해를 뼛속 깊이 겪었기 때문이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지자체 고위 공무원이 모조리 바뀌니 지역 행정이 엉망이 됐다.

일본에서는 국정은 정당이, 지방 단위에서는 무소속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래서 ‘이원적 정치 구조’란 평가도 받는다. 지방의원이나 기초단체장의 경우 정당 공천은 가능하지만, 유권자들은 무소속을 압도적으로 많이 당선시킨다.

2005년 12월 31일 현재 무소속 기초단체장(도쿄도특별구·시·정·촌장) 비율은 99.6%에 이른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일본의 지방 유권자들은 중앙 권력보다는 주민 이익에 민감하다”며 “상인회 등 지역 이익단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공약도 꼼꼼히 챙기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은 정당공천제가 활성화되어 있지만 정치 풍토가 국내와 전혀 다르다. 프랑스나 독일의 정당들은 당원들이 함께 모이는 총회에서 직접 추천과 투표로 지방선거 후보자를 선출한다. 투표에 참여하는 당원들은 대부분이 지역 주민이다.

한국공공자치연구원 정세욱 원장은 “유럽에서는 정당정치가 생활화되어 있어 중앙집권적인 우리나라 정당 정치와는 차이가 있다”며 “국회의원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어 국내에서처럼 중앙당이 전횡을 부릴 수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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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병희 차장 bbhe424@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