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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산책]아치와 씨팍&파이스토리

입력 | 2006-06-30 03:00:00

양아치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100% 성인용 한국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 사진 제공 영화사 도로시

어린 물고기의 목숨을 건 사랑이야기를 유머있게 담아낸 한미합작 애니메이션 ‘파이 스토리’. 사진 제공 디어유


▼‘18禁’의 비밀?… ‘아치와 씨팍’▼

자원이 고갈되고 인간의 ‘변’만이 에너지원이 된 도시. 정부는 환각 성분인 ‘하드’를 부상으로 지급하면서 인간들의 배변을 장려한다. 하드의 부작용으로 배변 능력을 상실한 돌연변이 ‘보자기 갱’들은 우두머리인 ‘보자기 킹’(목소리 신해철)의 지휘 아래 하드를 얻기 위해 도시를 습격한다. 하드를 밀거래 하던 ‘아치’(류승범)와 ‘씨팍’(임창정)은 초특급 배변 능력을 가진 ‘이쁜이’(현영)를 만나게 된다.

28일 개봉한 한국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의 키워드는 ‘배변’이다. 인간이 더럽고 하찮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변’을 귀한 자원으로 상정하는 전복적 상상력은 물론이거니와 이 애니메이션을 가득 채운 욕설과 잔인무도한 액션, 경황없이 바쁜 이야기 전개는 욕구불만에 가득 찬 현대인의 ‘배설 욕구’를 제대로 자극한다.

국내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18세 이상’ 등급을 받은 이 영화의 장점(?)은 욕지거리든 액션이든 그 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거나 행동할 수는 없지만 성인이라면 한 번쯤(혹은 매일) 상상해 보는 ‘나쁜 짓’으로 천연덕스럽게 화면을 채운다.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유머 코드(오직 변과 항문에 얽힌)와 불편하다 싶을 정도로 중첩되는 사지절단 이미지는 이 영화의 오류가 아니라 존재 이유인 것이다(따라서 이 영화는 다수가 유쾌하게 느낄 수는 없다).

스머프처럼 앙증맞은 외모의 보자기 갱들이 개구쟁이 같은 손놀림으로 면도칼을 휘저으면서 상대의 손목을 잘라 내고, 별일도 아닌 것처럼 항문을 이리저리 학대하고, “호모 새끼”와 같은 욕설을 애 이름 부르듯 하는 이 영화의 ‘정색하고 막무가내인’ 분위기는 ‘엽기적’이라는 단어로는 수습할 수 없는 일탈적이면서도 정리된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만화 캐릭터라는 비현실적인 대상을 통해 욕설과 악행이 배출되는 순간 오히려 ‘제대로 지저분한’ 현실감을 획득하는 야릇한 함수관계….

사실, ‘아치와 씨팍’이 숨기고 있는 최대의 유머는 캐릭터의 이미지가 그 캐릭터 뒤에 숨은 목소리 주인공의 이미지와 일대일로 포개어지는 순간에 있다. ‘막 살 것 같은’ 이미지의 류승범이 ‘진짜 막 사는’ 아치의 목소리를 맡고, ‘내숭 100단’처럼 보이는 현영이 알고 보면 엄청난 뒷구멍(항문) 능력을 가진 새침데기의 음성을 연기하고, ‘사사건건 무게 잡는’ 신해철이 사이비 교주 같은 보자기 킹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건 스스로를 비꼬고 패러디하는 유희정신의 정점이요 ‘비호감’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니모’의 짝퉁?… ‘파이 스토리’▼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는 상어 앞에 놓인 자그맣고 힘없는 물고기…. ‘니모를 찾아서’(이하 ‘니모’)와 너무도 흡사한 한미 합작 애니메이션 ‘파이 스토리’(이하 ‘파이’)의 포스터를 보기만 해도, ‘파이’가 ‘니모’의 ‘짝퉁’이란 의심은 절로 든다. 실제로 ‘파이’는 고아가 된 새끼 물고기의 성장 이야기라는 큰 틀에서부터 구체적인 설정이나 캐릭터, 이야기 전개방식에 이르기까지 ‘니모’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니모’의 주제인 가족애를 이성 간 러브 스토리로 살짝 변주한 것만 빼면 말이다.

보스턴 앞바다에 사는 철없는 어린 물고기 파이. 어느 날 인간이 쳐놓은 그물에 부모를 잃고 만다. 유일한 혈육인 펄 이모를 찾아 카리브 해로 간 파이는 1급수에만 사는 슈퍼모델 물고기 코딜리아를 보는 순간 반하고 만다. 코딜리아에게 흑심을 품은 호통상어 트로이에게 결투를 신청한 파이. 결투 일을 앞두고 파이는 전설의 무공을 가진 거북이 네리사를 찾아간다.

원본과의 비교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짝퉁’의 운명. ‘파이’는 기술적으로나 이야기로나 ‘니모’에 근접하기 어려운 수준의 성취도를 보여준다. 특히나 수중생물들이 가진 표면의 질감 처리나 입체감, 원근감, 그리고 바다 세계를 표현하는 색감에서는 총체적인 기술력의 부족을 드러낸다. 파이가 부모를 잃은 사실이 영화를 관통하는 파이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일과성 에피소드에 그쳐 버린다는 점, 파이의 고통과 고민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점, 파이의 사랑에 절실함이 없다는 점 등은 이야기의 긴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된다.

영화는 거북이 해파리 상어 불가사리 오징어처럼 수십 가지 캐릭터를 줄줄이 나열하지만,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이 그들이 지니는 생물학적 특성(독특한 움직임이나 습성)과 개연성 있게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극적 긴장과 즐거움은 반감된다.

‘파이’에서 즐길 만한 대목은 목소리 캐스팅이다. ‘SS501’의 김형준(‘파이’)과 개그맨 박명수(호통상어 ‘트로이’), 중견배우 임채무(거북이 ‘네리사’)의 음성은 목소리 주인공들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성우 뺨치는 수준인 그들의 목소리 연기가, 행동보다는 말(대사)로 때우려 드는 이 애니메이션의 안일한 전술을 100% 덮어주는 건 아니다. 7월 6일 개봉. 전체 관람 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