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제헌국회는 새 나라의 국호 채택 문제로 논쟁에 휩싸였다.
광복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여러 정치단체가 새 나라의 건국을 구상하면서 저마다 나름대로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공 신익희가 주도한 행정연구회는 1946년 3월에 작성한 헌법 초안에서 국호를 ‘한국’이라고 정했고 유진오가 1948년 5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헌법 초안에는 국호를 ‘조선민주공화국’이라고 칭했다. 1948년 6월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유진오 안의 국호는 ‘한국’이었다. 이 밖에 한민당과 시국대책협의회(대표 김규식·여운형)에서는 국호를 ‘고려공화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 자격으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1919년 9월 이래 한민족의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불러 온 이승만은 앞으로 건설될 새 나라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제시한 것.
이후 1948년 6월 3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 표결에서 ‘대한민국’ 안이 17표, ‘고려공화국’ 안이 7표, ‘조선공화국’안이 2표, 그리고 ‘한국’안이 1표를 얻었지만 논란은 정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7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안 제2독회가 열렸을 때 국호 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를 그대로 통과시킬 것이냐 마느냐가 맨 먼저 토론에 부쳐졌다. 이승만은 “불온한 세력이 작란을 치려는 시점인 만큼 1분이라도 빨리 헌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국명이 나쁘다고 독립이 잘 안 되는 게 아니니, 차차 국정이 정돈되고 나서 대다수의 결정에 의해 그때 법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며 ‘대한민국’안의 원안 통과를 제안했다.
곧 이어 실시된 거수 표결에서 재석 188명 중 찬성 163표, 반대 2표로 ‘대한민국’안이 채택됐다.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호이기도 했던 ‘대한민국’에는 한 편의 일화가 전해진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허름한 셋집에서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이 밤새 열렸다.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은 신석우 의원이었다. 그러나 여운형 의원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에 잠시 쓰다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신 의원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 보자”며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이 채택됐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