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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역사 읽기 30선]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입력 | 2006-07-08 03:00:00


《“옛 배움을 익히고 연구해 처음 세웠던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합니다만, 잡다한 일이 저를 얽어매어 종일 겨를이 나지 않습니다. 또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곳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고봉)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퇴계)-본문 중에서》

“기 선달에게… 병든 몸이라 문 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먼 길에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퇴계)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행히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받고 보니 깨닫는 것이 많아 황홀하게 심취했고, 그래서 머무르며 모시고 싶었습니다.”(고봉)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존경받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이 1558년 문과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편지를 썼다. 이때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편지는 이황이 사망하기 한 달 전인 1570년 11월까지 한 해도 거름 없이 계속됐다.

남다른 학문적 열정과 치밀한 사고력을 가졌던 고봉은 학문과 입신출세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퇴계에게 조언을 구했다. 고봉의 강직한 성품과 재능을 알아보았던 퇴계는 그에게 두 길을 함께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실제로 선조에게 고봉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퇴계였다.

이 책은 13년의 세월 동안 지속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를 담고 있다. 총명한 젊은 학도를 아끼는 노학자의 인품이 흠뻑 묻어나는 퇴계의 문장과 노학자를 존경하고 의지하면서도 따질 것은 따져야겠다고 덤비는 패기만만한 고봉의 글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의 성품은 이들이 각각 편집했던 책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모두 주희의 학문을 존중하여 각각 주희문집의 발췌본을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고봉의 ‘주자문록(朱子文錄)’은 주희의 글 중 소논문 성격의 글들을 모아서 주자학의 핵심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인 데 반해, 퇴계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는 주희가 문인들과 나눈 편지글들을 통해 주희의 학문과 더불어 그 인품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퇴계와 고봉의 편지를 모은 이 책은 ‘고봉적’이기보다는 ‘퇴계적’이다. 1558년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돼 조선 최대의 학술 논쟁으로 확산된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의 내용도 담겨 있지만, 서로에 대해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인생사를 나누는 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이 추구했던 학문의 목적이 인간 심성과 도덕 판단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논증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사단칠정논쟁의 주변 분위기까지 시시콜콜 엿볼 수 있는 이 편지들은 그 논쟁 이상의 것을 전해 준다.

전직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국립대 총장)에게 당돌하게 반론을 제기하는 고봉이나 26세 연하의 학자에게 서슴없이 질문을 하고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이황의 모습 자체가 이미 이들이 이뤄 낸 학문의 ‘인간적 경지’를 보여 준다.

김형찬 고려대 교수·한국철학